제도적 통제에 숨은 뜻
1.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제 합방한 후, 무단통치를 시작했다. 그렇게 통일한 일본은 모종의 이유로 조선인들을 오로지 노동력으로만 간주했다. 합방을 기점으로 일본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회의 땅 조선으로 넘어오기 시작했고, 동양척식 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는 국유지에서 소작하며 살던 조선인을 내쫓고 일본인 지주들에게 공시지가 1/10 수준으로 땅을 넘겨줬다.
땅값이 1/10인 기회에 땅에서 자연스럽게 일본인들의 커뮤니티가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해방 직전까지 약 80만 명에 육박한다. 이런 그들을 위해 일본은 근대 학제인 소학교(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의 3 학제를 제공한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이런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그들이 조선인에게 주고 싶은 교육은 일본어와 충성 그리고 복종뿐이었다. 그래서 6년제 보통학교라는 것을 만들었고, 이것만이 조선인에게 허가된 유일한 교육이었다.
2.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유생들은 실력을 키워서 국권을 되찾자는 일념 하에 자체적인 서당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기존 서당이 한학만을 가르쳤다면, 이 서당은 근대적 학문과 독립의식을 교육시키는 특이한 서당이었다. 이런 서당은 1911년 기준 16,540개에서 1918년에는 무려 23,369개로 50%가 증가할 정도로 기세가 좋았다.
무식한 조선인을 만들기에 혈안이 된(?) 일본이 이를 반길리 없었다. 일제는 서당 규칙을 만들어 이런 서당을 탄압했다. 제 아무리 훈장이 교육의 열의에 차 있어도 일본이 대놓고 핍박을 하자 '찍히기 싫은' 사람들은 자식을 차마 서당에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부모들은 칼을 찬 선생이 있는 보통학교로 학생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
왜 일본인 교사들은 자기 나라에서도 안 차던 칼을 차고 수업을 했을까?
3.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일본도 먹고살기가 힘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은 열강의 대열에 서고 싶었는데 당시 열강의 수입원이란 산업도 수출도 아닌 식민지로부터의 수탈이었다.
식민지의 선두주자 영국의 경우 식민지의 인구는 4억, 영국의 5600만 인구는 이 4억을 갈취해서 먹고살 수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 전쟁의 후발주자인 일본은 청나라도 마음껏 뜯어먹을 수 없었고 주 수입원은 조선땅뿐이었다.
문제는 조선의 인구는 겨우 2000만, 일본의 당시 인구는 공교롭게도 5000만. 영국의 경우 영국인 1명을 7명의 식민지 사람들이 먹여 살렸다면 한국의 경우 2명이 일본인 5명을 먹여 살린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우리나라를 악착같이 뜯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악질적으로 뜯어먹으려면
뜯어 먹히는 쪽이 똑똑하면 안 된다
뜯어 먹히는 쪽이 멍청해야, 반항도 못하고 대항도 못하고 뜯어 먹히지 만약 제대로 배웠다면 이에 문제제기를 할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자기들의 명령을 알아들을 정도로만 교육시킨 것이다.
둘째는 일본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노하우가 없었다. 영국, 포르투갈의 경우 초창기 식민지 진출은 말도 안 될 정도로 잔학해서 말이 식민지 지배지 거의 '학살'과 '약탈'의 퍼레이드였다. 하지만 이후 노하우(?)가 쌓이면서 식민지의 생산성을 올리면서 영구히 뜯어먹는 방법을 도입한다. 물론 아편전쟁을 일으키는 걸 보면 근본적으로 변한 건 아닌 듯 하지만.
반면 일본의 경우 조선은 타이완에 이어 두 번째 식민국가였다. 하지만 타이완은 일본에 대한 반일감정이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오히려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강해서 일본에 대한 기대감도 작용한 게 사실이다. 물론 가혹한 수탈에 기대감이 절망으로 바뀌긴 했지만.
그러나 조선은 왜구,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이어진 일련의 침략으로 인한 반일감정, 일본인을 오랑캐로 여기는 민족의식이 강해서 저항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 여기서 칼이 등장한다.
4. 반감이 강한 사람에게 수탈을 하려면 이를 찍어 눌러야 한다. 그래서 조선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2대 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군부 출신, 그것도 식민지 강경파에 속하는 사람이다. 일본 군부는 영국처럼 식민지를 달래 가면서 오래 뜯어먹자는 온건파, 반항하면 짓밟자는 강경파가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 강경파만 골 라보 낸 것이다.
자연스럽게 정책은 강경책으로 흐른다. 심지어 군부의 강압적인 정책에 협조적이지 않은 인물, 기관, 기업은 모조리 조선에서 퇴출되기까지 했다.
칼은 이런 강경파의 정책의 일환이었다.
보통 일부 일본 기업이라던가 야쿠자 사무실에 가면 일본도와 일본 갑옷이 놓여있는 곳이 있다. 심지어 일본에서 약간 수상한 금융업체게 가면 벽에 칼이 주르륵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종의 위협이다.
사람은 이런 칼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이 칼로 나를 벨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이 경계에 맞춰 움직인다. 혹시 학창 시절에 부러진 골프채라던가 하키채를 들고 다니는 교사, 가위를 들고 다니는 교사를 본 적이 없는가? 저자는 세트로 다 봤는데 물론 이 사람들은 학생을 두들겨 패거나 긴 머리를 잘라낼 때 활용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노린 것은
그 도구들을 보고 공포심을 느껴서 알아서 자중하도록 만든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 일본인들은 타이완, 조선 등의 소수 식민지에서 최대한 빨아내기 위해 식민지 사람들을 강하게 탄압해야 했다. 탄압을 하려면 '반항하면 다친다'는 생각을 주입해야 했다. 실제로 서당에 다니는 사람들을 탄압을 통해 보통학교로 보냈고, 이 보통학교에서는 '칼'을 통해서
우리에게 반항하면 죽음뿐
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결국은 원활한 착취를 위한 강압적인 큰 그림이었던 것이다.
5. 이런 서슬 퍼런 일본의 강압정치는 3.1 운동 이후에 바뀐다.
일본은 고종황제의 장례식을 일본식으로 진행, 조선 황제인 고종은 일본 천황의 신하라는 프레임을 만들려고 했고 이에 반발한 조선 민중은 자체적으로 고종을 추모하는 모임을 기획했다. 이것이 바로 3.1 운동이다.
3.1 운동을 보고 무조건 찍어 누르는 게 답이 아니라는 온건파의 주장을 뒷받침해줬고, 이후 교사는 군복과 칼을 벗어던지고 양복을 입기 시작했다.
PS : 몇 년 전인가 꽤 조건이 좋았는데 사장실에 일본도가 두 자루 걸린 걸 보고 안 간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과민 반응한 걸 수도 있지만 아마 그 회사는 폭압으로 사원들을 컨트롤하지 않을까요? 혹 그렇지 않다면 일본문화의 잔재인 칼 걸어두기는 자제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