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장 도둑

바람 한 줄기에도 당신이

- 정현주, '거기, 우리가 있었다' 중에서

by hearida

"여름을 견디고 가을에 도착하던 날의 하늘처럼 더 넓어진 것이다.

자란 것이다. 사랑을 통과하며 너는."


- 정현주, '거기, 우리가 있었다' 중에서



낮에 본 에펠탑을 잊지 못해 해가 진 후 다시 찾아가던 길이었어요.


2년 전, 파리의 전철역.

제 갈길을 향해 움직이는 사람들에 섞여 걸음을 옮기는데 어디선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돌아보니 한 구석에 허름한 악사 한 명이 서 있었어요.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고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데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어요.

멈춘 것은 오직 하나.

급할 것 하나 없는 제 발걸음뿐이었습니다.

동전 몇 개가 전부인 바이올린 통도 무심히 스쳐가는 사람들도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어요.

꼭 감긴 눈 아래 그의 입술은 미소로 가득했거든요.


한 음 한 음이 바람을 따라 흐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음들이 흐르고 흘러 제 귀에 부드러이 닿는 순간.

떠올랐어요.

함께 오지 못한 사랑하는 그 사람이.


이곳에 함께였으면.

우리가 함께였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서서 연주를 들었어요.

그리고 그 음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반짝반짝 빛나는 밤의 에펠탑을 보았지요.

밤이 되어 숙소로 돌아와 창을 활짝 열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악사의 연주와 에펠탑과 파리의 야경을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말했어요.

창 밖에 부는 바람 소리에도 당신이 생각나는 그런 하루를 살았다고.


지금도 좋은 것을 보면 여전히 그를 떠올리는 매일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좋은 것을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요?

그렇다면 그 마음을 소중히 간직하셨으면 해요.

혹여 그런 사람이 없다 해도 실망하진 마세요.

어쩌면 누군가 이 바람 한 줄기에도 당신을 떠올릴지 모르니까요.


부디 오늘도 작고 소박한 삶의 하나하나에 고운 얼굴 가득 떠오르는 날이 되기를.

여름을 견디고 가을에 도착한 하늘처럼 사랑의 터널 안과 밖에 있는 우리 모두가 따스히 행복하기를.




Paris, France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9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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