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반드시 잊힐, 기억이므로

- 김병수, '감정의 온도' 중에서

by hearida

"불쾌한 기억을 극복하는 (억지로 잊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방법은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겁니다. 불쾌한 기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체험입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수다도 떨고, 연인과 손잡고 영화도 보고,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숲길을 산책하고, 위안이 되는 음악을 몰입해서 듣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 김병수, '감정의 온도' 중에서



요즘 들어

체력과 시간, 그리고

이 모든 걸 합친 효율성의 측면에서

지하철을 제법 타는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길을 아무리 돌아가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무조건 버스만 타고 다녔어요.


고등학생 때는

등굣길에 기분이 꿀렁거리면

학교를 땡땡이치고 귀에 음악을 꽂은 채

버스에 앉아 몇 바퀴고 거리를 돌곤 했고요.


대학을 가고 회사를 가고

또 그 회사를 나와서도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 날에는

무작정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곤 했어요.


등하교 및 여러 약속들을 포함해서

가장 많이 이용하고

또 가장 사랑하는 버스가 있는데요,

바로 721번이에요.


721 버스를 타면

창 밖으로

서울의 가장 번화한 거리들이

하나하나 스쳐 지나가요.


그리고

그 거리들을 스쳐가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그 거리 위에 서 있던 제가 겹쳐져요.


친구 또는 연인과 함께이거나

혼자인,

앳된 얼굴이거나

세월의 무게가 드리워진,


그런 제가 있어요.

환하게 웃기도 했지만

가끔은 한없이 우울한 채로

때로는 펑펑 울기도 하는 모습으로.


언젠가

지독한 실연을 겪었을 때

721 노선을 따라

여섯 시간을 내리 걸었던 적이 있어요.


그 사람을 떨쳐내려고

다리가 퉁퉁 붓도록 걷고 또 걸으며

그렇게 울었는데

그 후로도 한참을 잊지 못하고 아팠어요.


721 버스만 타면

그 사람과 함께 있던 가게와

그 사람이 좋아하던 이름만 보면

주룩주룩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평생 그럴 줄 알았는데

평생 잊지 못하고

평생 눈물만 흘리며

평생 아플 줄 알았는데.


지금은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가게와 같은 이름을 봐도

아무렇지 않아요.


새롭게 쓰인 추억 덕분에

웃음이 나거나

꾸벅꾸벅 졸다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곤

가끔 깜짝 놀라기도 해요.


아, 그랬던 적이 있었는데 싶어서요.

그런데 다 잊었구나 싶어서요.

진짜 아무렇지 않는구나,

그런 생각 때문에.


불쾌하고

아프고 슬픈

그런 기억은

언젠가 반드시 잊혀요.


우리는 살아있고

그리하여

매일 쉼 없이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고 있으니.


부디 지난 시간 위에

덧대어지는 지금의 풍경이

더없이 아름답기를.

곱고 포근한 그런 것이기를.


담뿍,

담뿍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진심이에요. :)




Firenze, Italy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