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예나, '나는 오늘부터 피아노를 치기로 했다' 중에서
어렸을 때 제 꿈은요, 아이 열둘의 엄마가 되는 것이었어요.
제가 아이들을 진짜 진짜 좋아하거든요.
그렇다고 열두 명을 낳겠다니.
지금 생각하면 그저 아찔, 하네요.
스무 살에 결혼해서 십 년 안에 다 낳아보겠다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포부를 중학생 때까지 지녔는데요.
스무 살이 넘도록 연애 한 번 못하는 숙맥이었던 탓에
꿈은 그저 꿈으로 다행히, 끝났어요.
이 자리에서 슬쩍 말씀드리자면
저는 지금 서른일곱의 나이에 첫 아이를 품게 됐습니다.
이제 9주 차를 향해가는데 어마어마한 입덧에 시달리고 있네요.
그래서 요 몇 주 많이 게을렀다고 핑계 아닌 핑계를 대어봅니다.
열둘은 아니지만 엄마로서의 꿈에 조금은 다가선 요즘,
새삼 어려서의 두 번째 꿈이 떠올랐어요.
바로 피아노 선생님이에요.
참 단순하게도,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참 예쁘셨거든요.
그런데 솔직히 저, 피아노에는 영 재주가 없었어요.
다섯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 그렇게 오래 쳤는데도요.
제대로 치는 곡이 한 곡도 없는 거 있죠.
박자 감각도 없고 연습하는 것도 진짜 진짜 싫어했어요.
학교 끝나면 한 시간씩 꼭 들러야 했던 학원도 귀찮았고
선생님이 체크하던 연습장도 성가셨고
어쩌다 엄마가 와서 뒤에서 지켜보면 그것도 짜증 났고
무엇보다 매일 그렇게 치는데도 안 느는 실력에 늘 화가 났었어요.
그래서 전공을 바꾼 뒤로는 한동안 쳐다도 안 봤어요.
못 기르던 손톱도 길게 길게 기르고요.
늘 열어뒀던 피아노 뚜껑은 꼭 닫아둔 채로
그 위에 이것저것 늘어놨었어요.
그래도 친정에서 지낼 때는 종종 쳤거든요.
어쩌다 혼자 있을 때 기분 내키는 대로 치면 마음이 좀 편안해졌는데요.
그마저도 결혼을 하고 신혼집으로 이사를 하고 나니 칠 기회가 전혀 없어졌어요.
그렇게 진짜 피아노와 멀어지게 됐죠.
그러다 작년 12월 즈음, 장 보고 오는 길에 피아노 학원 간판을 봤어요.
동네 꼬마 아이들이 다니는 작은 교습소였는데요.
무작정 들어가 어른도 가르쳐주시냐 여쭤봤더니 흔쾌히 좋다고 하셨어요.
네, 그렇게 다시 피아노를 치게 됐습니다.
진짜 신기한 게요.
다시 치는 피아노는 기억 속의 느낌과 전혀 다르네요.
그때는 선생님이 열 번 연습하라고 해도 엄청 힘들고 한 시간도 참 길었는데요.
지금은 두 시간이 지나도 2분처럼 짧기만 해요.
예전에는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무작정 쳤거든요.
틀리거나 말거나 빠르거나 느리거나 되는대로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한 마디만 백 번을 치고 또 쳐도 지루하지가 않아요.
그 시간이 그저 너무 즐겁고 신기하고 좋은 거 있죠.
무작정 쉽게 생각할 게 아니었나 봐요.
피아노 앞에서 시간만 보낸다고 될 일이 아니었는데.
더 마음을 정성을 들여야 했는데.
그걸 이제야 깨닫게 됐어요.
긴 시간을 돌고 돌아 다시 피아노 앞에 섰어요.
무언가 되겠다는 큰 꿈은 없지만 무언가 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참 좋네요.
피아노 하나 시작했을 뿐인데
삶이 더 풍요롭고 더없이 즐거워졌어요.
어떠한 것을 지루하다, 재미없다, 싫다 말하기 전에
조금 더 마음을 주어봐야겠어요.
더 찬찬히 보고 더 깊이 생각해야겠어요.
그러면 무미건조한 일상에도 봄처럼 꽃이 피지 않을까 싶어서요.
어제는 날이 참 좋았어요.
앞으로 다가올 날들은 더 포근하겠지요.
기적처럼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이
우리의 매일에도 기적처럼 담뿍 행복이 피어나기를. :)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