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린카 비슈티차 외, '내가 사랑했던 모든 애인들에게' 중에서
겁이 많아서 그랬는지
제법 나이가 들어서야 처음으로 연애를 시작했어요.
그 전에도 사랑은 있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드라마에서 나오는 운명처럼 꼭 같지만은 않았거든요.
제 인생 최초의 남자 친구였던 그 사람은 딱 봐도 아주 멋있었어요.
인물도 좋고 집안도 좋고 학벌도 좋고
보이는 모든 게 좋은 그런 사람.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한없이 자상하지만
오직 나에게만 그렇지 않던 사람.
억울해서 얘기하는 건데
그 사람의 겉모습 때문에 사귄 건 아니었어요.
아니, 솔직히 그 사람은 제 스타일과는 멀었거든요.
근데 그렇게 앞뒤 안재고 고백하는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이것저것 재고 따지고 계산하는 관계에 지쳐있다가
그런 접근이 신선했달까,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모습에 마음이 기울고 말았어요.
만나기 시작하고 나니 엄청 설레대요.
사람들 앞에서
'여기, 내 남자 친구' 하고 말하는 기분이
아, 이런 거구나 싶어 짜릿한 게
앞으로 핑크빛 날들만 계속될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 사람은 달랐나 봐요.
막상 사귀고 보니 제가 별로였던 것 같아요.
너무 쉽게 변하고 말았어요.
그렇게 미치도록 네가 좋다고 말하던 사람이
그 입으로 저를 너무 아프게 하더군요.
어떻게든 기어코 제가 상처 입기를 바라는 것처럼.
네가 이쁜 것 같아? 아니야, 착각하지 마
그만 먹어, 살찌고 싶어서 환장한 것 같아
미련하게 좀 굴지 마.
꺼져, 닥쳐.
웃지 마, 웃겨? 지금 너 한 대 칠 뻔했어.
등등 등등 등등
아무도 알지 못했어요.
사람들은 우리가 완벽한 커플이라 말했고
저는 그들 앞에서 침묵했습니다.
그 모든 걸 감내하고서라도
사람들이 제가 사랑받는 사람이라 생각하기를 바랐어요.
지금의 비참함을 모두가 알게 되면
마치 이마에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버텼지만 결국 그와는 헤어졌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10만 피스 정도 되는 퍼즐을 일생에 걸쳐 끼우고
마지막 한 피스를 겨우 찾아 완성해 벽에 걸어두었는데
갑자기 퍼즐이 폭발해 그을음만 남은 벽 앞에
피를 뚝뚝 흘리며 서 있는 제 모습이 떠올라요.
너무 아팠어요.
온몸이 불에 덴 듯 고통스러웠어요.
함께 있는 게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고 너무 힘들었는데
그런 사람이라도 곁에 없다는 게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제 자신이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는 길게
일주일 한 달은 빠르게
시간이 이상한 속도로 무심하게 흘렀어요.
한 세 달쯤 지났을까,
허기도 느끼고 울지 않고 잠드는 날이 며칠씩 이어지면서
저는 두 가지를 깨달았어요.
하나는,
시간은 정말 약이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제가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 날 이후로 연애가 조금 편해졌어요.
쉬워진 건 아니지만,
아무리 아프거나 힘들어도 또 설령 지금의 관계가 엉망이 된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친 마음은 괜찮아질 거고
나는 다시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거든요.
그리고 그 믿음이 제게 힘을 줬어요.
이후로도 여러 번의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지독한 아픔과 고통 속에
눈물 흘리며 힘들어했지만
저는 한 번도
제가 사랑으로 행복해지리라는 걸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어요.
모두에게 사랑이 어려운 날들이에요.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촌스럽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그런 무심한 말들 때문에
쉬이 사랑에 발을 내딛지 못하고
자꾸만 피할 수도 있어요.
상대가 아무리 나를 아프게 해도
이 사람이 아니면 다신 사랑을 못 할까 봐
지금의 관계를 놓지 못하고
매일 새로운 상처를 마음에 내며
지옥 같은 날을 보낼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말이에요.
앞이 보이지 않고
지금이 끝인 것만 같아도요.
사랑은 다시 와요.
시간이 흐르고
당신이 잘,
살아만 있다면
사랑은
꼭 와요.
6천5백만 년 전에 멸종을 맞이한 공룡처럼
사랑이라는 말도
사랑하는 사람도
언젠가 영원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여전히 사랑을 믿고 사랑을 하는 당신을
멸종 위기의 보호종보다
더 귀하고 특별하게 아껴줄
그 단 하나의 사랑이
지금
지구 저 끝에서 당신에게 걸어오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아프지 말아요.
울지 말아요.
힘들지 말아요.
시간을 믿고
당신을 믿고
꼭 행복해요.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