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감옥이라고 합니다
음모론과 우주의 비밀에 유독 관심이 많은 친구가 있다. 그는 만나면 몇 시간이고 외계인이 지구에 온 증거나 밝혀지지 않은 세상의 미스터리에 관해 쉼 없이 이야기하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의 얘기에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사실은 듣는 족족 한 귀로 흘리며 술을 마시거나 안주를 끄적이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한 번은 솔깃하여 오래도록 귀 기울였던 이야기가 있다.
- 이 지구가 사실은 우주의 감옥이래.
그의 말에 따르면, 사실 지구에 사는 우리 모두는 우주의 범죄자들로 살던 별에서 쫓겨나 지구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곳에서 우리가 받는 형벌은 바로 망각. 원래 우주의 존재들은 죽고 다시 태어나도 전생의 기억을 잊지 않고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한다. 하여 환생을 거듭하면서 긴 세월에 걸쳐 획득한 어마어마한 용량의 지혜와 경험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구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면 죽으면서 이생의 기억들을 모두 망각하고, 환생한 후에는 생존에 관한 지식을 비롯한 모든 것들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기에 그의 육체가 쇠하기 시작할 때에야 비로소 인생의 진리 같은 것들에 겨우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뿐이다.
그 말을 듣고서 나는 무릎을 탁, 쳤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옆집 남자는 자기 집 문에 붙은 전단지를 아무렇게나 구겨 바닥에 버리는가, 왜 저 운전자는 초록불에 횡단보도에서 슬금슬금 브레이크를 풀고 나에게 다가오는가 등등 매일 수도 없이 화를 내며 인간 본성에의 의문을 가지고 있던 나는 그제야 성선설이 틀린 말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거대한 우주의 죄인이 죄다 모여있다는 이 별에서 대체 내가 뭘 바라고 있는 거야.
그날 이후 내가 지구 감옥설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받았는지 정작 그 친구는 아마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나는 모든 불합리와 부조리와 악행을 목격할 때마다 '그래! 여기는 감옥, 우리는 죄인'이라는 말을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이곳에서 선이나 아름다움 따위를 바라는 내가 어리석다고 말이다.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한 건, 지구 감옥설이 내 안에서 정점을 찍은 서른 살 즈음이었다. 회사 생활도 지옥 같고, 만나는 사람은 거지 같고, 사는 건 엿 같은 그즈음. 진짜 내가 사는 모든 곳이 감옥처럼 답답해서, 더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고 그저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러고 사나 싶던 그때. 입버릇처럼 이 세상은 전쟁터, 우리는 이 전쟁에서 승리해야만 한다를 부르짖던 엄마가 여행으로 인생의 2막을 시작하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그 날 이후 부모님의 손을 잡고 네팔로 날아가 트래킹을 했다. 그 해 가을에는 아드리아해를 따라 크로아티아 일주를 하며 몬테네그로와 보스니아, 슬로베니아를 탐험한 후, 터키의 너른 땅을 고루 누비고 돌아왔다. 다시 숨을 고른 후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돌아 헝가리와 체코와 오스트리아를 넘어 이탈리아를 함께 했고, 일본과 태국의 작은 도시들에서 머무르기도 했다. 그리고 더 자주 우리나라의 곳곳을 향해 달려가곤 했다.
그렇게 여행을 하며 해가 동쪽 땅에서 떠서 서쪽 바다로 지는 것을 수도 없이 지켜보았다. 두브로브니크의 성벽에 올라 도시를 조심스레 깨우던 아침 햇살이 안면도 바다에 사이좋게 서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바위 사이로 가만히 지는 걸 떠올리면 마음도 붉게 물들곤 했다. 푸르른 물아래 깊은 속이 훤히 드러나 얼굴을 비추기도 하고,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걸음을 받치던 돌이 반짝반짝 매끄럽게 빛나기도 했다. 트렌치코트를 멋지게 차려입은 노부인의 모습에 찬사를 보내거나, 바다 앞에서 그대로 웃옷을 벗어던지는 아주머니의 자유로움에 박수가 절로 나오는 날도 있었다.
이곳이 진짜 감옥이라면, 어째서 이렇게 아름다운 걸까. 여행을 떠나고 돌아올 때마다 늘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는다. 나는 범죄자들에게 매끼마다 주어지는 콩밥 한 톨도 아까워 죽겠는데, 신은 아니 우주인들은 어째서 우주의 범죄자가 머무는 이 별에 이런 아름다움을 기꺼이 허락하는 것일까. 이유야 잘 모르지만, 이런 형벌이라면 달갑게 받고만 싶다.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을 망각하여 늘 새롭게 감동할 수 있다면, 이 감옥에 오래 머물러도 나는 좋겠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