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장 도둑

모두와 한없이 멀게 느껴지는 날에

- 최은영, '쇼코의 미소' 중에서

by hearida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 최은영, '쇼코의 미소' 중에서



저는 빈말로라도 사교성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을 때는 비교적 잘 어울리고 분위기도 잘 띄우는 데다

나이가 들면서는 모르는 사람 하고도 능글능글 말도 잘 섞기는 하는데요.

그건 그때뿐.

누군가와 길게 인연을 이어가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남들에게 저를 드러내는 일이 무서웠어요.

혹여 내 결점을 발견하고 흉을 보면 어쩌나 싶어

보이고 싶은 모습만 보이느라 애를 썼는데요.

그러다 보니 자꾸만 사람들 모이는 자리가 어색해져서

피하고 피하다 결국 혼자인 게 익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리가 힘든 저에게

다행히도 친밀한 개인이 늘 있었습니다.

가끔은 가족보다, 저 자신보다 더 제 마음 가까이 자리해

제 기쁨과 힘듦을 모두 나누는 존재였어요.

그런 개인들로 인해 무리에 속하지 않고도

지금껏 저는 어찌어찌 잘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들 중에는 여전히 친밀한 이들도 있지만 이제는 멀어진 이들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제가 떠나보내고 누군가는 저를 떠났습니다.

한때는 상대를 욕했고 한때는 저를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그토록 멀리하고 싶었던 사람도 언젠가 어떤 계기로 가까워질 수 있으며

영원히 함께 하고 싶었던 사람도 어떻게든 기어이 떠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은 제가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이기도 하며

미처 예측할 수 없는 상대의 사정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가끔 모두와 한없이 멀게 느껴지는 날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 어두운 방 한구석에 오도카니 앉아있으면

'한없이 외롭고 외롭다' 생각하는 그런 깊은 밤이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때에는 꼭 모든 게 다 내 탓인 것만 같아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후회를 하고 또 해봅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서 사람도 그런 것임을,

누구의 잘못도 아닌 채 부서지는 관계도 있음을 기억했으면.

떠난 이 있으면 들어오는 이도 있으니

오늘은 다만 그 사이의 어느 날일 뿐이라 여겼으면.

설령 모두 떠나도

당신에겐 여전히 당신이 있으니 그걸로 되었다 생각했으면.


깨어진 관계의 조각에 베인 상처가 이제 그만 아무는 밤이기를.

날은 추워도 마음은 따뜻한 그런 밤이기를.


Zurich, Switzerland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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