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장 도둑

우리는 불타지 않았어요

- 게일 허니먼, '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 중에서

by hearida

"얼굴 한쪽 - 손상된 절반 -이 서커스단 광대처럼 된 게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경우보다 더 낫다. 화재로 죽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나는 불에 타 재가 되지 않았다. 나는 어린 불사조처럼 불꽃을 뚫고 나왔다. 흉터가 남은 곳을 손가락으로 쓸고 그 울퉁불퉁한 윤곽선을 어루만져보았다. 나는 불타지 않았어요, 엄마, 내가 생각했다. 나는 불을 통과해 나왔고, 나는 살았어요.

내 심장에는 얼굴의 흉터만큼이나 두껍고 보기 흉한 흉터가 있다. 나는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안다. 손상되지 않은 조직도 조금은 남아 있기를 나는 희망한다. 사랑이 들어오고 흘러나갈 수 있는 부분이 작게라도 남아 있기를. 나는 희망한다."


- 게일 허니먼, '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 중에서



고장 난 심장으로 오래 살아왔구나,

지나온 날들을 거슬러 올라보다

심장이 머무는 자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봤어요.


살면서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했고

일에서의 실패나 꿈의 포기로 좌절하거나

불행한 일들이 인생을 덮치기도 했어요.


그럴 때마다 삶은 큰 불에 휩싸였고

저는 불길 한가운데 갇혀 데이고 아파했지만

결국 이렇게 불타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불에 탄 살은 금세 회복이 돼도

꺼먼 연기가 배어든 심장은 멈춰 움직이지 않았어요.

몸은 일상으로 돌아와도 마음은 줄곧 과거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던 심장의

아주 작게 남아있던 손상되지 않은 조각에

따스한 기운이 스며들며 변화가 시작됐어요.


가족의 보살핌이나 연인의 사랑

누군가의 작은 친절 혹은 새로운 희망의 발견 같은 것들이

심장의 딱딱해진 부분을 조금씩 녹여주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다시 말랑해진 심장의 힘찬 고동을 매일 느끼며

이렇게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네요.

어느새 2019년도 다 지나버리고

이제 과거의 날이 되려 합니다.


이 한 해가 유독 힘들었던 사람이 있을 거예요.

모든 게 불타 재가 되고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덩그러니 홀로 남은 사람이.


그래도 우리

불타지 않았어요.

그 불꽃을 뚫고 이렇게 살아남았습니다.


어쩌면 몸과 심장에

굵은 흉터가 남고

또 많은 것이 손상되었을지라도


그 모든 것은 2019년과 함께 과거에 남겨두고

손상되지 않은 것들만 그러모아

품에 꼭 안고 앞으로 나아갔으면.


나아가는 그 걸음 사이로

따스한 햇살과 희망, 사랑처럼

좋은 것들만 드나들 것을 알기에


새로운 한 해에는

새 살이 돋고 다시 심장이 뛰고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될 것을 믿으며.


올 한 해도 고생하셨습니다.

잘 살아남아주어 감사합니다.

내일은 어제보다 더 담뿍 행복하세요.


Goreme, Turkey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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