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문장 도둑

좋은 흔적만 남겼으면 해요

퍼트리샤 윌트셔, '꽃은 알고 있다' 중에서

by hearida

"예컨대 나는 신발에 묻은 미세 입자를 살펴 당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낼 수 있다. 숲

정원을 따라 자란 블루벨 꽃가루가 신발에 묻어 있다면, 당신이 어느 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왔는지도 알 수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어디에서 머물렀는지, 어느 들판 한구석에서 기다렸는지, 어느 벽에 기대 연인을 기다렸는지까지 맞혀낼지도 모른다. 혹시 당신이 나와 사체로서 마주하는 불행한 영혼이라면, 피부와 옷에 자라는 균류, 머리카락과 옷, 신발에 묻은 꽃가루와 포자를 조사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연은 이처럼 우리 몸 안팎에 흔적과 단서를 남긴다. 우리가 환경에 흔적을 남기기도 하지만, 환경 또한 우리에게 흔적을 남기는 셈이다. 가끔은 그 단서를 잘 구슬려 얻어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에게, 자연은 언제나 비밀을 풀어놓을 것이다."


- 퍼트리샤 윌트셔, '꽃은 알고 있다' 중에서



일회용 제품은 되도록 사용하지 않고

장을 볼 때는 장바구니를 이용하고

설거지를 할 때도 세제는 최소한으로,

빨래는 한 번에 모아서 하기 등등.


살림을 하며 정한 규칙들이 있어요.

가능하면 지구에 해를 입히고 싶지 않다는 개인적 바람과

내 아이가 자랄 세상에 대한 염려가 담긴

저만의 친환경 생활 지침이랄까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저녁 산처럼 쌓이는 쓰레기며 재활용품들을 볼 때면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자책과 함께

마음이 답답해지고 걱정이 많아집니다.


예전에는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 웅장함 앞에 인간이 얼마나 작은지 보지 못했고

자연의 소중함 따위 나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그러니 그것이 어그러졌을 때의 공포를 알 리 없었지요.


처음으로 자연과 제대로 대면한 건 2011년 일본 대지진 때였어요.

출장으로 일본 토치기현의 작은 마을에 머물고 있었거든요.

느닷없이 땅이 흔들리더니 멀쩡히 서 있던 차가 구르기 시작하고

지척에 있는 바다의 수면은 매 초마다 몇 미터씩 올라가고 있었어요.


하루아침에 마을 하나가 사라지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그 순간,

그것이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로 인해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진 못했지만

적어도 자연을 거스르는 삶을 살지 말아야겠다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가 들썩이는 요즘입니다.

자연재해는 무섭기도 하지만 무력한 감정이 앞서고

전쟁이나 테러는 슬픔과 허무함이 강한데 비해

이런 바이러스의 공포는 인간의 광기를 마주하게 돼서 한층 더 공포스러워요.


저는 과학은 영 모르기에

그저 남들만큼의 정보와 남들만큼의 줏대밖에 없어서

자주 흔들리고 두려워하며 한껏 움츠린 채 살고 있어요.

그저 빨리 이 사태가 수습되기만을 기다릴 뿐이지요.


입자나 균류, 꽃가루나 포자, 혹은 바이러스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것들이 늘 우리 몸에 붙어 있어요.

제가 매일 세상에 내버리는 쓰레기처럼

자연도 우리에게 항상 흔적을 남기고 있어요.


자연과 인간이 서로에게 남기는 흔적이

좋은 것이 많았으면 합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해볼 수 있는 만큼은 그래도.


두려운 것들은 자연의 깊숙한 품에 남겨둔 채

너무 파헤쳐지지 않은 채로,

티 없이 맑은 하늘과 풍요로운 대지와 깊고 넓고 깊은 바다는

우리의 아이들의 아이들의 아이들의 곁에서도 여전히 남아있기를.


항상 감사합니다.

담뿍 행복하세요.

무엇보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세요.


Chiang Mai, Thailand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

keyword
hearida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에세이스트 프로필
팔로워 4,0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