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atia_DubrovnikⅨ
떠나기 전 그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린다.
송곳보다 날카로운 말로 서로를 찌르고 찌르다 끝내 그 상처에 무뎌졌던 때.
그럼에도 끝내 놓지 못했던 미련한 시간들.
내가 긴 여행을 떠나겠다 했을 때 그의 얼굴에서 본 것은 체념이었다.
티끌 하나 없이 투명한 살얼음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그와 나.
이제 와장창 깨어버린 얼음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잠긴 물속에서 우린 다른 방향을 향해 팔을 저었다.
이윽고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내 마음은 평온했다.
집착도 나쁜 생각도 다 내려놓았다.
미안함도 그리움도 보내버렸다.
그리고 찾아온 소박한 행복과 잔잔한 마음.
내가 누리는 이 하루와 우리가 보낸 오늘.
기억돼야 마땅한 소중한 나의 날들을 옳지 못한 생각들로 채울 수는 없기에.
다가올 삶의 한 조각 한 조각을 더 소중히 여기며
따스하게 따스하게 살아가야지.
부둣가에 가만히 앉아 어두운 바다 위에 내려앉은 불빛들을 내려다본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지낸 시간을 돌아본다.
아직 남은 날들을 셀 필요도 없이, 두브로브니크가 겨우 시작일 뿐이라는 생각에 안도한다.
조금만 더 바다를 보고 가자.
그리고 다행히 아직 늘어나지 않은 짐과 채 펼쳐보지도 못한 책, 휘갈겨 쓴 찰나의 생각이 잠긴 일기장을 챙겨야지.
사람들은 나처럼 들뜬 가슴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다.
누구에게도 내일의 고민은 보이지 않는 것만 같다.
이곳의 바다는 밤이 되어도 거세지지 않는다.
그저 담담히 일렁이며 사람들의 눈길을 받아 비춘다.
낯선 바다에서 나는 안도한다.
할 수 있다면 이곳에 더 오래 머물고 싶었다.
이 따스함 아래 조금만 더 있을 수 있다면.
지난 며칠 동안 나는 그 방법을 찾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돌아갈 비행기표를 혼자라도 찢어버릴 수 있는 용기를 바라고 바랐지만.
이곳이 현실이 되고 나면 또 지겨워질 테니.
현실은 늘 고단하고 지루한 시간을 문신처럼 새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마음속에 언제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이 낯선 바다가 여전히 낯설어서, 한없이 새롭게 느껴져 다행이었다.
내일은 이곳을 떠난다.
차를 빌려 아드리아해를 따라 무작정 달려보기로 했다.
아래로 아래로 크로아티아를 넘어 몬테네그로까지.
다시 옆으로 달려 보스니아까지.
그리고 위로 위로 스플리트를 지나 자그레브, 국경을 넘어 슬로베니아까지.
그래, 나는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지금에 머물지 않기 위해 금 밖으로 성큼 한 발을 내민다.
지금보다 나을지 알 수 없지만 지금과는 분명 다를 테니까.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