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lcinj, Montenegro
무화과는 언제나 재래시장을 떠올리게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린 무화과로, 어릴 적 할머니 손을 잡고 재래시장에 가면 말린 과일을 파는 가게 한쪽에 가득 쌓여있었다. 딱딱하게 굳어 쭈글쭈글한 베이지색 겉껍질이 호두나 도토리를 떠올리게 했는데, 한입 깨물면 찐덕찐덕한 식감에 설탕을 가득 부은듯한 단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나는 단 음식을 꽤나 좋아하지만 말린 무화과는 내가 좋아하는 류의 단맛 - 이를테면 초콜릿 같은 -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 번도 스스로 찾아 먹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크로아티아를 일주하며 무화과에 대한 나의 깊은 오해가 단번에 풀렸다. 아니, 풀렸다는 말은 너무 건방지다. 무지한 내가 무화과에게 행했던 그동안의 평가절하가 얼마나 무례했던지 당장에 무릎 꿇고 사과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다. 태양과 바람의 손길에 싱싱하고 달콤하게 익은 생물의 무화과를 맛보지도 못한 주제에 나는 어쩌자고 무화과는 맛이 없다고 단정해버렸던 걸까.
구김 없는 아드리아해의 태양은 매일 자신의 품에 안긴 모든 땅에 고루 빛을 선물했고, 어디서든 바닥까지 제 속을 다 보일만큼 맑디맑은 바다를 품은 바람은 그 땅 위에 선 모두에게 부드럽게 불어왔다. 덕분에 어떤 동네든 각 집마다 마당에는 각양각색의 나무들이 푸르디푸른 잎을 풍성하게 드리우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았던 것이 레몬과 무화과였다. 너무 많이 열려 미처 따기 전에 떨어지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가지에 남은 것만 따도 온 가족이 다 먹지 못하는 과일의 풍요가 어디에나 가득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 머무는 숙박객이나 또는 지나는 길에 눈이 마주친 이방인에게 과일을 후하게 나눠주었다. 그 덕에 늘 속이 허한 여행자들은 넘치는 인정으로 속을 달래며 다디단 과일로 배를 가득 채울 수 있었다. 나 역시 과즙이 흘러넘치는 무화과의 신세계를 경험하고는 '무화과란 이리도 맛있는 것이었구나' 감동하며 매일 배가 터지게 무화과를 먹어댔다.
그런 무화과의 매력은 몬테네그로의 울치니Ulcinj에서 정점을 찍었다. 아무 계획 없이, 그저 크로아티아의 아래에 있으며 아드리아해로 이어져 있다는 이유 하나로 무작정 떠난 몬테네그로였다. 그러나 코토르Kotor도 부드바Budva도 어쩐지 조금 한적하고 쓸쓸한 느낌이 들어 아쉬움이 컸다. 아마 제철보다 조금 이른 방문으로 사람이 적기도 했거니와, 전날까지 머물렀던 두브로브니크Dubrovnik가 너무 빛이 나 그 반짝임에 눈이 멀어 모든 게 뿌옇게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크로아티아나 보스니아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되나 고민하다 시간이 애매해 차라리 밑으로 더 내려가 보기로 했다. 이 모든 아쉬움을 날려버릴 보석 같은 마을을 발견한다면 참 좋겠다, 기대하면서. 그렇게 도착한 게 울치니였다.
아직 시즌을 맞이하지 못한 해변의 마을은 한산했다. 해는 저물어가고, 저녁 준비를 하느라 집으로 돌아갔는지 인적 하나 없는 동네 입구를 흘끔거리는데 근처에서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자 레몬빛 벽이 조금 바랜 2층 집이 나왔다. 잘 정돈된 마당 한쪽에서 나이 든 할아버지는 런닝 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아직 어린 손자는 바퀴 하나가 빠진 트럭으로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오후를 깨는 게 미안했지만 별도리가 없어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놀라 놀이를 멈춘 아이도 잠에서 깬 할아버지도 말간 눈을 들어 꿈뻑꿈뻑 이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두 손을 포개 얼굴에 대어 잠자는 흉내를 내면서 숙소를 물었고, 할아버지는 손가락으로 마을의 안쪽을 가리켰다.
과연 안으로 들어서자 숙소가 제법 많이 있었다. 방의 청결도와 창으로 보이는 풍광과 방값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머물 곳을 찾고 있는데, 때마침 한 숙소 앞에서 밖으로 나오던 주인과 눈을 마주쳤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시원하게 큰 키에 머리를 질끈 묶은 그녀는 환한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하룻밤 머물고 싶은데 우선 방을 볼 수 있겠냐 부탁하자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그녀는 2층으로 안내했는데 방 두 개와 욕실, 주방, 거기다 베란다까지 있는 방이 단돈 40유로였다. 베란다에는 분홍인 듯 보라인 듯 고운 빛깔의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저 멀리 바다와 마을의 풍경이 한눈에 펼쳐졌으며, 곳곳에 뚫린 작은 창들로는 집을 에워싼 나무의 잎들이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묵겠다고 대답했다. 좋은 숙소를 구한 기쁨과 오늘 잘 곳을 구한 안도감에 두 팔을 올려 기지개를 하며 기분 좋게 마당을 내려다보는데, 빈틈없이 가득 심어진 나무에 석류며 무화과가 가득 열려 있었다. 방값을 계산하며 나는 이곳의 무화과는 참 맛있다고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어차피 자기는 어머니와 둘이 살아 다 먹지 못하니 마음껏 먹어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저녁 식사를 위해 슈퍼에서 장을 보는 동안 잠시 비가 내렸다. 숙소로 돌아오자 마침 비가 그쳐, 마당으로 내려가 무화과를 조금 땄다. 베란다에 있는 테이블에 음식을 꺼내 놓고 한숨 돌리며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득 핀 꽃잎마다 맑은 물방울이 담겨 빛나고, 하늘은 석양으로 물들어 그야말로 그림 같은 평온하고 아름다운 순간이 내려앉아 있었다. 몬테네그로에서의 모든 실망이 감탄으로 바뀌었다. 아, 내가 마음을 닫고 이런 아름다움에서 고개를 돌린 채 이곳을 떠나려 했구나, 안도와 감사와 반성의 마음을 담아 와인과 샌드위치, 그리고 싱싱한 무화과를 크게 깨물었다.
다음 날 아침, 주인은 떠나는 나를 잠시 불러 세워 봉지 하나를 내밀었다. 열어보니 말린 무화과가 가득했다. 겉은 살짝 갈색빛이 돌지만 안은 한없이 보드랍고 달콤한 과육이 가득한 무화과. 한입 베어 무니 오동통하니 젤리처럼 쫀득한 식감이 일품이었다. 한입 가득 욱여넣은 탓에 말을 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눈으로 맛있다고 말했다. 그런 나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그녀는, 무화과를 깨끗이 씻은 후 끓인 소금물에 담갔다가 말리고 또다시 담갔다 말리고를 며칠이나 해서 맛이 좋은 거라 했다. 이 고장의 볕과 해수로 단맛이 더 풍부해지고 쫀득해지는 거라고. 가는 길에 간식이나 좀 하라고 넣었다며 먼 곳까지 와주어 고맙다는 말고 덧붙였다. 그렇게 말하며 웃는 그녀의 눈가에 따스함이 가득해 내 마음까지 번졌다.
그날 이후로 아직 어디서도 같은 맛은 다시 경험하지 못했다. 내가 못내 잊지 못하는 그 달콤함은 몬테네그로의 태양 때문이었을까, 아드리아해의 바닷물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미소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다시 떠나고 싶은 나의 간절함 때문일까. 무화과가 먹고 싶다.
헤아리.다 / 3개의 언어 / 4개의 전공 / 8번의 전직 / 20개국 100여 개 도시 여행 빈곤 생활자 / 위대한 먹보 / 유쾌한 장난꾸러기 / 행복한 또라이 / 꽤 많은 도전과 무수한 실패 / 손에 꼽을 수 있는 내 사람들 / 단 하나의 사랑 / 끝없이 이어지는 삶 / 마음과 글과 사진과 세상을 헤아리고픈 소박한 욕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