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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Aug 09. 2022

'행동은 인성의 반영이다'

- 존 더글라스, '마인드 헌터'

스릴러물은 도저히 못 보겠다. 그게 활자든 영상이든, 누군가 위협을 당하거나 죽을 위험에 처하는 걸 견디지 못하겠다. 간이 콩알만 한 탓에 인물에 감정이입을 너무 과하게 해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에 땀이 줄줄 흐른다. 결국 책장을 덮거나 리모컨의 정지 버튼을 누르기 일쑤.

그런데 이미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범인을 쫓는 건 또 엄청 좋아한다. 덕분에 각종 범죄 수사드라마를 얼마나 보았던가. 벌써 20여 년도 더 된 나의 수사물 사랑은 CSI 시리즈(라스베이거스, 마이애미, 뉴욕)를 비롯하여 NCIS, NCIS LA, 본즈, 크리미널 마인드, 멘탈리스트, 성범죄 수사대, 로 앤 오더, 콜드케이스, 캐슬, 하와이 파이브 오, 언포게터블, 시카고 PD, 최근에는 FBI 시리즈까지 섭렵하는데... 아, 얼마나 많은 수사물을 보았던가. 그런 나를 보며 신랑은 지겹지도 않냐고 절레절레 고개를 젓지만 재방의 재방조차 놓칠 수 없다.

최근에 넷플릭스에 본 '마인드 헌터'는 그 연장선에 있다. 처음엔 단순히 드라마인 줄 알았는데 논픽션 원작이 있다는 말에 바로 구입. 사전을 방불케 하는 두께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읽고 말았다.


'양들의 침묵' 잭 클로포드의 모델이자 내가 사랑하는 TV시리즈인 '크리미널 마인드' 제이슨 기디언의 실존 인물이기도 한 전前 FBI 조사관 존 더글라스가 쓴 '마인드 헌터'는 저자가 행동과학과에 프로파일링을 도입하는 경위를 상세히 그린다.

그는 행동과학과에서 프로파일링이 어떻게 과학적 방법으로 확립되어 활용되었는지를 다양한 사례를 모아 열거한다. 다수의 범죄자를 직접 인터뷰하여 얻은 데이터의 축적과 연구를 통해, 사체를 포함하여 현장에 남은 증거에서 범인의 시그너처를 산출하는 심리학적, 통계학적 방법으로서의 프로파일링이 확립되는 과정이 꽤나 흥미로웠다.


책 자체는 오래전에 쓰였으므로 80년대 범죄가 중심이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지금, 사이코패스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어 왔을까.

읽는 내내 소설을 읽는 것과 비슷한 긴장감이 있었다. 다만 이런 논픽션의 괴로운 점은 실제 사례이기에 피해자, 그리고 남겨진 가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수사 기법이 발전하는 건 다행이지만 그 발전의 기저에 수많은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슬프다.

책을 통해 새삼 엽기적 살인마가 새로운 사람이 되는 일은 없다고 통감했다. 그런 악마들을 사회에서 몰아내기 위해 대체 몇 명의 희생이 있어야 할까. 아무쪼록 소중한 사람이나 나 자신이 그 대상이 되지 않기를 기도할 뿐.

인간이 인간을, 인간이 다른 생명을, 인간이 제발 자신 이외의 다른 무언가를 파괴하지 않고 그저 아끼고 사랑하며 살 수는 없는 걸까? 인간은 악을 품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걸까?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인간이 사는 이 지구가 과연 아름다운 별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들을 어떻게든 저지하고자 뒤쫓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마냥 좌절할 수만도 없는 게 다행인가 싶다.


어쨌든 TV에 관해서는 나와 취향이 몹시 일치하는 엄마는 다시 태어나면 프로파일러나 과학수사요원이 되고 싶다는데, 왕년에 그녀가 어린 나의 거짓말들을 꿰뚫어 파헤치고 단죄하던 걸 떠올리면 잘 어울릴 것 같다.

근데 엄마, 아빠한테 화날 때마다 '범죄 드라마 경력 20년에 이제 당신을 쥐도 새도 모르게 보낼 방법 열 가지 정도는 알고 있다'고 협박하는 건 참아주세요. 아빠는 익숙해서 괜찮은데, 옆에서 밥 먹는 사위는 깜짝깜짝 놀라 자꾸 체해요. ㅠㅠ




문명이 시작된 이래 모든 끔찍한 범죄에는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절박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도대체 어떤 유형의 인간이기에, 이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FBI의 수사지원부에서 하는 프로파일의 유형화 및 범죄 현장 분석 작업은 바로 그런 질문에 대답하려는 노력이다.
행동은 인성의 반영이다.
우리의 프로파일링 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흉악 범죄 자체의 성격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우리 부서들의 요원들이 하는 수사 방식을 '연역적 방식'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귀납적'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특정 범죄의 몇 가지 특수 요인을 파악하여 거기에서 더 큰 결론을 얻어내기 때문이다.
범인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범죄를 살펴야 한다.
'무엇'이 발생했나? 이 질문에는 범죄와 관련된 행동의 중요 사항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왜' 그런 식으로 발생했나? 가령 왜 살인한 다음에 시체를 도륙했나? 왜 귀중품을 가져가지 않았나? 왜 강제 침입하지 않았나? 이 범죄에서 중요 행동 요인들을 설명하는 이유들은 무엇인가?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누가' 그런 이유로 그 같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까?
바로 이런 것들을 조사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이런 동물학대가 '살인범 징후를 드러내는 삼각형' 중 한 축을 이룬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즉 일정 연령 이후에도 계속되는 야뇨증과 방화, 동물학대는 무서운 삼각형의 각 꼭짓점을 차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연쇄 살인범 대부분이 사냥과 살인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이 두 가지가 '본업'이기 때문에 늘 그 문제만을 생각한다.
제압, 조종, 통제. 이것은 연쇄 살인범의 특징을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세 가지 핵심용어이다. 그들은 희생자를 마음대로 제압, 조종, 통제할 수 있을 때에만 자기들의 삶이 보람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의 연구와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나는 성범죄 관련 살인자들을 사회에 복귀시키는 문제에 대단히 회의적이다. 만약 이들을 교화시킬 목적이라면, 아주 어릴 때 징후를 파악하여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 범죄자의 기괴한 환상이 현실로 나타날 때에는 이미 늦은 것이다.
연쇄 살인범을 굳이 정의하자면 '성공적인' 살인범이라 할 수 있다. 범죄를 해나가면서 그 경험에서 자꾸만 배워나가기 때문이다.
왜 그 많은 희생 대상자를 놔두고 하필 이 희생자를 골랐을까? 피해자는 어떻게 살해되었을까? 이 두 가지 질문을 던져놓으면 곧이어 자연스럽게 '누가?' 하는 질문이 나온다.
MO는 후천적으로 획득된 행태이다. 범인들이 범죄를 저지를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역동적이어서 변할 수가 있다. 시그너처는 MO와 구분하기 위해 내가 만들어낸 말인데, '범인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성취하기 위해 저지르는 행위이다. 이것은 정적인 특징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때로는 엄청난 고통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목수가 나무를 가다듬고 석수가 돌을 쪼듯이, 수사관은 범지를 목석처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세간에는 그토록 오랫동안 사형 대기수로 내버려둔다는 것은 잔인하고 비정상적인 징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들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사형 집행을 늦추고 그토록 오래 끈다는 것은 정말 잔인하고 비정상적인 조치이다. 특히 스미스 가족과 헬믹 가족에게는. 어디 그들뿐인가. 아까운 나이에 죽어간 두 소녀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정의가 제때에 이루어지기를 늘 고대하고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런 흉악범의 사형 집행을 자꾸만 늦추는 것일까.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중요한 사항은 정신이상이 의학적 정신분석 용어가 아니라, 법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신이상은 그 범죄자가 '아픈가' 혹은 '아프지 않은가'를 뜻하는 게 아니다. 법에서 말하는 정신이상은 그 범죄자가 자신의 범죄를 책임질 수 있는가 혹은 없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 헤아리.다;hear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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