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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rida Aug 16. 2022

그 시절, 독서 중독자였던 소녀

- 이창현, 유희,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사실 난 익명의 독서 중독자는 아니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면, 이렇게 내가 뭘 읽었다 주저리주저리 쓸 일은 없겠지. 나는 대놓고 독서 중독자이다.

하지만 솔직히 요즘엔 독서 중독자라 하긴 좀 부끄럽기도 하다. 그런 별명(!)을 붙이기엔 책 읽는 속도와 양과 질이 모두 과거에 비해 너무 너절하다.


그래.

그 시절, 나는 중독자였다. 독서 중독이자 또한 활자 중독.


쓰기만 하면 눈이 좁쌀만 해져서 절친조차 '안경 쓰고 나오면 너랑 안 놀 거야'라는 조건부 손절을 당할 만큼 못난이 안경을 쓰게 된 원인도 이 중독 탓. 그리고 큰 맘먹고 한 라섹수술의 대성공이 다시 실패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근원도 이 중독때문.

약을 먹듯 늘 무언가를 읽고 있어야만 안정이 되었던 나의 젊은 날.


그게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로 연명하던 고조선 시절이었던가, 쩝...

어쨌든 그때는 나와 너의 연락이 줄이 달린 집전화로만 가능하다가 핸드폰조차 오로지 전화의 기능만 하던 날들이었고, 훗날 인터넷이라는 획기적 신기술이 핸드폰에 적용되었으나 금단의 그 버튼을 누르면 다음 달 핸드폰 고지서를 본 엄마에게 등짝이 터져라 얻어맞던 그러니까 그즈음.

TV는 공중파 외에 비디오나 DVD 밖에 없던, 그러다 케이블 TV가 생긴 후에도 보고 싶은 프로그램은 편성표 시간을 확인해야 하던 그 날들.

어딜 가든 책을 들고 가야 마음이 편했고, 그마저도 한 권만으론 다 읽을까 불안해 두 권은 가방에 넣어야 했으며, 읽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필사하고 감상도 적어야 했기에 노트랑 필기구까지 꾸역꾸역 챙겨 다녀 가방이 꼭 보부상의 그것처럼 큼지막했던 그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책 대여점이 있어서 책 한 권에 300원이면 빌리던 학창시절. 그때 만화 외에  가장 인기 있던 책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였던가, 이용도의 『드래곤 라자』였던가. 나는 황미나며 이은혜, 원수연, 한승원 등등 그들의 순정만화를 또 얼마나 빌려봤던가.

그러니까내가 한복에 옷고름 고이 여미고 머리에 비녀 꽂고 마차 타고 갔었지, 아마.


그때는 엄청 읽었다. 하루에도 서너 권은 아무렇지 않았지. 읽고 나서 기억도 다 했는데.

그런데 어느 순간 SNS가 생겨나고 핸드폰으로 볼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져서 너무 긴 장문은 읽기 힘들어지고. 겨우 그걸 고쳐서 다시 읽나 했더니 애가 생기고. 그러니까 자꾸 어른들 말은 어려워지고 아기 말 "맘마 먹으까요?" "응가 하까요?"같은 말만 하네.

혹은 너무 생활감 넘치는 말이 많아졌다. 예를 들면 "집값이 올랐나?" "오늘 미국 연준이 금리 발표했나?" "저 새끼 정치 왜 저지X이야?" 같은 말이 익숙해져서 아름답고 수려한 문어와 접하기가 힘들어졌다.


이제는 사실 독서 중독자라기보다는 익명의 책 수집가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작년 이사할 때 이사 아저씨가 책 박스를 첫 번째 꺼내면서 "책 좋아하시나 보네요" 하시더니, 열 번째 박스를 풀 때 퀭한 눈으로 째려보며 "이거 다 읽는 거예요?"라고 물었을 때 내 마음은 또 얼마나 찔렸던가...

그러니까 나는 익명의 책 수집가이자 한때 독서 중독자였으며 곧 다가올 미래에 다시금 중독을 꿈꾸는 자랄까.


뭐, 그래도 책을 좀 읽는다 하는 사람에겐 이 책이 코미디 빅리그보다 웃음 포인트가 많다는 데 내 손모가지를 걸겠...다고 하기엔 아직 어린 내 딸 화장실 뒤처리는 누가 해주나. 그럼에도 책 안 읽는 사람에겐 또 이게 어떤 인문 경제 서적보다 더 재미없을 수 없다는 데 나머지 손을 걸 수도.

어쨌든 난 너무 깔깔대고 웃어서 우리 가족들이 그 모습을 조금 두렵게 바라봤다는 얘기. 특히, 독서 중독자들에게 친구가 없다던가, 책 표지나 저자나 역자를 보고 책을 고른다던가, 베스트셀러를 경계한다든가. 그 중에서도 독서 중독자의 남편이 책을 안 읽는다는 데서 특히 빵 터진 건 여보 미안.


참, 여기서 소설을 너무 읽으면 문체가 어쩌고 저쩌고 해서 못 쓴다지만 아무래도 나는 소설이 재밌다. 특히 요즘처럼 책이 안 읽힐 때 코지한 추미스는 최고인 걸.





- 헤아리.다;hear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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