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arida Aug 04. 2022

여름의 빌라에서는 서늘한 바람이 분다

- 백수린, '여름의 빌라'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작가가 써내려 간 여덟 편의 이야기가 실린 작가 백수린의 소설집. 이 책에서 주인공들은 어딘가 불안하다. 정착하지 못하고 주변을 부유하는 연약한 깃털처럼, 그들은 자신이 머문 곳의 경계에 서 있다. 그 경계에 선 채 원 안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거나 어긋나거나 돌아선다. 어떤 이들은 주저 없이 중앙으로 혹은 밖으로 발을 내딛겠지만 백수린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들은 자신의 선 자리와 그곳에서의 감정에 대해 끝없이 살피다 결국 받아들이기도 하고 끝내 멀어지기도 한다.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묻어둔 마음 한쪽에 여전히 살아있는 후회, 꺾여버린 꿈이나 체념, 상실, 손상된 감정. 그들이 외부의 세계와 접촉하는 순간 때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거나 혹은 아예 소멸할 듯 부서지면서, 그 충격으로 심장을 두드리고, 그렇게 자신의 건재함을 알린다. 이 책은 그런 찰나를 포착해 섬세하게 그려내었다. 그리고 그 펜의 끝에 마음이 찔리면 읽는 이도 함께 움찔, 하고 망각했던 자신의 감각들을 깨우는.


여름의 빌라에서는 서늘한 바람이 분다. 청량하기보다 서글픔을 간직한, 그렇다고 너무 슬프지만은 않은. 옅은 고단함에 묻은 바람이 분다. 아름다운 문장 사이로 몇 방울의 눈물이 섞여 볼에 닿는다. 백수린, 그 이름과도 닮은.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일종의 슬픔을 몸 안에 가두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진공 하여 가둔 그 슬픔이 가는 바늘 끝 하나에 스르르 바람이 빠져나가면 그때 슬픔의 원형과 마주하고 뒤늦게 아파하는, 그런 찰나의 순간을 마주하겠지. 그러나 그건 그리 오래가지는 않는다. 일상이라는 공기가 다시 슬픔을 가두고, 그럼 우린 다시 일어나 가던 길을 가겠지. 여름의 빌라를 지나쳐.


꼭 여름에 읽겠다고 아껴둔 건 참 잘한 일이었다. 이 여름을 떠올리면 기억의 한편에 꼭 남겨질.



어떤 기억들이 난폭한 침입자처럼 찾아와 '나'의 외벽을 부술 듯 두드릴 때마다, 이러다가는 내가 한순간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은 아닐까 두려우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나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행복에는 정해진 양이 있어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처럼, 다급히 내가 "그거 나쁜 거 아닐까. 언니는 남의 가정을 망가뜨리고 싶어?"라고 언니에게 말했을 때의 그 눈빛. 억지로 웃으려고 하지만 끝내 물에 녹아내리는 물감처럼 한없이 희미해지던.
그리고 우리는 폭우 속을 달렸다. 웃음을 터뜨리면서. 머지않아 거짓말같이 비가 그치고 해가 날 거라는 사실엔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처럼. 지금도 그날을 추억하면 빗속을 뛰어가는 언니와 나의 모습은 손끝에 닿을 듯 생생하고, 그러면 나는 어김없이 울고 싶어진다.
무無. 당신의 집 거실에 적혀 있던 글자처럼, 사실은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그저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은 어째서 이토록 미욱해서 타인과 나 사이에 무언가가 존재하기를 번번이 기대하고 또 기대하는 걸까요.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자리가 있고, 각자의 역할이 있어. 거기에 만족하고 살면 그곳이 천국이야. 불만족하는 순간 증오가 생기고 폭력이 생기지. 증오와 폭력은 또다른 증오와 폭력을 낳고 말이야. 그게 우리가 지난 반년을 보내고 얻은 교훈이야."
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 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때가 되면 우리는 옷가지와 부려놓은 짐을 챙겨들고, 열차에서 내린 후 영원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 할 거예요. 풍화된 것들은 바람에 흩어져 없어지고 말겠죠. 그렇지만 나는 덜컹거리는 열차 위에 아직 타고 있고, 여전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 당신이나 지호처럼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이 편지를 쓴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요, 베레나, 이것만큼은 당신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신의 기억이 소멸되는 것마저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순리라고 한다면 나는 폐허 위에 끝까지 살아남아 창공을 향해 푸르게 뻗어나가는 당신의 마지막 기억이 이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딸이 낳은 그 어린 딸이 내게 그렇게 말한 후 환하게 웃는 장면이요.
넌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그런 말들은 끈끈하게 내 발바닥에 들러붙어 어디든 걸을 때마다 쩍쩍,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인생의 결정적인 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불현듯 그녀는 자신이 지금껏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일찍 철이 든 척했지만 그녀의 삶은 그저 거대한 체념에 불과했음을.
오래전, 스스로 너무 늙었다고 느꼈지만 사실은 아직 새파랗게 젊던 시절에 할머니는 늙는다는 게 몸과 마음이 같은 속도로 퇴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굳는 속도에 따라 욕망이나 갈망도 퇴화하는.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알았다. 퇴화하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사실을.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어김없이 인간이 평생 지은 죄를 벌하기 위해 신이 인간을 늙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음은 펄떡펄떡 뛰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는데 육신이 따라주지 않는 것만큼 무서운 형벌이 또 있을까? 꼼짝도 못하는 육체에 수감되는 형벌이라니.
난생처음 맛보았던 그 황홀하도록 달콤한 맛. 그 기억에 대해서도 브뤼니에 씨에게는 영원히 말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낯선 섬에 홀로 표착한 것 같았던 할머니의 일생이나, 하루가 너무 길 때마다 차라리 빨리 죽여달라고 신에게 간구하지만, 막상 죽음 이후를 상상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극심한 공포에 대해서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듯.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습게도 느닷없이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주는 즐거움. 계획이 어그러진 순간에만 찾아오는 특별한 기쁨. 다 잃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새 한여름의 유성처럼 떨어져내리던 행복의 찰나들. 그리고 할머니는 일어나서 브뤼니에 씨와 함께 탑 위에 각설탕 하나를 더 쌓았다. 하나를 더. 또 하나를 더. 그러다 탑이 무너져내릴 때까지. 각설탕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할머니와 브뤼니에 씨가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릴 때까지.
그것은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던가 하고. 노인의 삶이 사지가 마비된 뇌졸중 환자의 것과 다르지 않다니. 이렇게 살아서, 할머니의 몸은 이렇게 살아서 이 모든 것을 생생히 느끼고 있는데.
(...) 그는 그녀를 끌어안아주면서, 우리는 안고 있어도 왜 이렇게 고독한 것일까, 속으로 되뇔 뿐이었다.
나는 무엇이든 선택을 할 때면 그 대가로 미래를 지불해야 하는 줄 몰랐던 날들이 이미 가마득히 멀어졌음을 안다.

                    


- 헤아리.다;heari.da


매거진의 이전글 불가능How과 불가해 Why를 노크노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