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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Nov 19. 2020

새벽에 버무린 갓김치

버릴 수 있는 것과 버릴 수 없는 것

퇴근하고 마트에 들렀더니 갓이 다. 누런 떡잎 하나 붙어있지 않고 잎사귀 끝까지 빳빳한 초록의 알싸함이 짙게 묻어있는 돌산갓이 신선하기 그지없다. 이 맘 때가 아니면 이런 갓을 구경하기 어렵다. 가을 햇살이 아니면 김장철 갓이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잎채소 이파리를 태워 녹이는 한여름 뙤약볕이 물러나기 시작할 때 갓의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면 갓은 가을 햇볕을 초록의 엽록소로 줄기와 잎에 가두어놓는다. 봄에 언 땅이 녹은 틈으로 쑥과 냉이, 곰취가 피워낸 연하디 연한 첫 이파리를 먹는다면, 겨울이 코 앞에 와 있는 지금은 가을 햇볕이 굵고 튼실한 줄기와 듬직하고 넓은 이파리에 가득 가두어진 푸성귀를 먹어야 한다. 배추와 무의 잎도 좋지만 갓의 강단 있는 알싸함은 몸을 뜨끈하게 하는 느낌이 있어 더 좋다. 마흔이 넘어 추위에 취약한 몸으로 변하니 겨울 추위를 만나는 것이 겁난다. 추위와 한바탕 싸움을 앞두고 있는 지금 큰 칼을 찬 우람한 장수처럼 갓의 초록 이파리가 호기롭게 보인다. 저 큰 줄기를 하나 먹으면 가을 햇볕이 입안 가득 들어와 내 몸을 따뜻하게 할 것만 같다. 보약을 사듯 판매대에 있는 다섯 단의 돌산 갓을 모조리 사 집으로 배달시켰다. 나는 휴일도 아닌 평일에 갓에 초록으로 가두어진 햇볕을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만들기 위해 아마도 밤늦게까지 부엌에 있어야 할 것 같다. 충동구매의 좋지 않은 결과다.


저녁을 하기 전 먼저 세 단의 갓을 다듬고 씻어 소금에 절여 놓았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후 마침맞게 절여진 갓을 씻어 물기가 빠지도록 채에 받혀놓고, 나머지 두 단의 갓을 다듬어 씻어 물기가 마르도록 소쿠리에 두었다. 세 단은 갓김치로 두 단은 장아찌로 만들어 겨우내 먹을 생각이다. 갓김치는 얼마 전 유튜브에서 봤던 대로 양념에 홍시를 넣고, 장아찌에는 올봄에 마늘과 마늘종 장아찌를 건저 먹고 남은 간장물을 따로 보관하였다가 고추씨와 간장, 매실청, 물을 더 넣고 끓여 소주와 식초를 넣은 간장물을 부었다. 다 끝내고 부엌 바닥을 닦고 나니 새벽 한 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는 이 새벽에 부엌에서 이러고 있다. 역시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다. 그러나 다 만들어서 통에 담아 놓은 갓김치와 갓장아찌를 보니 어깨는 아프고 목은 뻐근할 망정 흐뭇하다. 누가 시켜서 했다면 이 새벽에 왜 이러고 있나 싶었겠지만 가을 햇볕이 소복한 반찬으로 차린 상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을 우리 식구의 겨울 밥상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버리고 공간을 신박하게 정리하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나도 이제 작은 아이가 더 이상 가지고 놀지 않는 팽이며 자질구레한 장난감을 버리고, 아이들 체르니까지는 연습시킬 요량으로 중고로 샀던 피아노를 당근 마켓에 내다 팔고, 명작동화며 전래동화책을 어린아이를 키우는 직장 동료에게 주었다. 이제 부엌살림 차례다. 언젠가 소용될 것이라 여기며 사용하지 않고 가지고만 있는 살림이 한가득이다. 어떤 물건을 버리고 어떤 물건을 남길지 살림살이를 둘러보는데 풍년 압력솥 하이안 용량:341(5인용)에 눈길이 가 머문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 외국의 항구로 화물을 실어 나르는 배를 운전하는 일을 하러 가기 위해 남편은 출국을 앞두고 있었고, 어학연수를 다녀오느라 1년 휴학했던 나는 대학 3학년 겨울방학 중에 친구들과 함께 살던 빌라를 나와 나만의 옥탑방으로 이사를 했다. 내 생일이었고 이사한 내 옥탑방으로 소포가 왔다. 압력밥솥이었다. 출국을 앞두고 고향집에 잠시 머무는 남편이 보낸 생일선물이었다. 전화를 걸어 "너는 나를 생각하면 밥통밖에 생각이 안 나?"라고 퉁명스럽게 말은 했지만 좀 놀라기는 했다. 밥솥을 보내서 놀랐다기보다는 내 생일을 기억하고 선물을 보냈다는 것에 놀랐다. 그 당시 우리는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영 모르는 사이도 아닌 요즘 말로 하면 전남친, 전여친이었다. 그것도 헤어진 지 3년이 넘은. '내가 없는 동안 밥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어'라는 메시지뿐 아니라 '이 밥솥에 밥 해 먹을 때마다 내 생각을 하고'라는 메시지까지 함께 보낸 밥솥 선물에 나는 그가 얄미웠다. 군대 가면서 자기 자존심 세우느라 기다려 달라고 확실하게 말은 하지 않으면서도 기다려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몇 년 만에 불쑥 나타나 밥솥 하나 던져주면서 헤어지면서 있었던 일과 헤어진 후 그간의 모든 일은 없던 일로 하고 다시 저를 마음에 담아주기를 바라는 그가 얌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나는 그 밥솥을 받고 다시 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22년이 된 그 밥솥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가지고 있다. 여전히 힘찬 기차소리를 내면서 밥도 하고 수육도 삶을 수 있지만 솥 안이 검게 변하고 아이들이 태어나 식구가 늘어난 뒤로는 사용하지 않은지 오래다. 여러 번 결정을 번복한 끝에 정리되어 반짝이는 부엌을 위해 결국 버리기로 했다. 버리기를 결정하고도 버리기가 주저된다. 아직 쓸만해서 버리기가 주저되는 것이 아니라 스물세 살의 겨울, 전남친이 불쑥 보낸 선물을 받고 마음이 복잡했던 그러나 결국은 다시 설레기 시작했던 나의 하루가 생각나서 밥솥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버리자니 갑자기 섭섭함이 확 밀려와 재활용 쓰레기장으로 가는 남편을 불러 세워 급하게 사진을 찍었다.  


부엌에서 버릴 물건을 다 버리고, 싱크대의 묵은 얼룩을 닦아내고, 냉장고를 청소하고, 싱크대를 정리하는 선반을 사 필요한 물건만 정리하고 보니 이사 온 지 십 년 된 부엌이 새 부엌인 듯 깨끗하고, 보고 있자니 뿌듯하다. 계속 계속 부엌에 있고 싶다. 내가 바꿔놓은 내 맘에 쏙 드는 곳으로 변한 부엌에서 새벽까지 갓김치를 버무린다. 나는 갓김치를 스물여섯에 처음으로 먹었다. 전남친에서 현남친이 된 그가 긴 항해를 마치고 돌아와 함께 목포에 놀러 갔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이었다. 기차에서 여수 돌산 갓김치를 팔았다. 지하철을 타고 나의 자취방으로 나를 바래다주는 늦은 밤 언제 샀는지 그가 밥 먹을 때 반찬으로 먹으라며 갓김치 한 상자를 내밀었다. 그게 내 인생의 첫 갓김치였다. 그 갓김치를 받을 때 여자 친구에게 갓김치를 주는 그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갓김치도 전남친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압력밥솥처럼 참 생뚱맞았다.


나에게 압력밥솥과 갓김치를 선물한 남자. 다시 그에게 편지를 쓰게 만든 압력밥솥은 버리고 없지만, 그 남자는 내가 새벽까지 김치를 버무리든 말든 저 혼자 침대에서 쿨쿨 잠을 자고 있지만, 버릴 수 없는 추억이 있어서 나는 어깨가 아프고 목이 뻐근할지언정 새벽까지 이 부엌에서 갓김치를 버무리고 있어 행복하다. 막 행복하지는 않고..... 그냥 행복하다. 그래, 그냥 행복한 걸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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