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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Aug 13. 2020

요리, 나도 해 봤어

요리와 음식의 차이

대학 다니는 내내 중 고등학생들의 과외를 했다. 누군가에게 지식을 가르쳐주는 일은 가르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보다는 배우는 사람이 새로운 지식을 얼마나 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알쓸신잡 3에서 소설가 김영하의 "배움은 선생이 아니라 학생의 질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말은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가르치는 일을 하기 전에 선생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가르칠 학생의 상태를 살펴 학생이 공부할 준비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 준비를 일부러 시키지 않아도 이미 그런 준비가 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가르치는 재미가 있고 한 달 뒤 그 아이의 부모가 하얀 봉투에 넣어주는 수업료를 받을 때도 당당하고 보람찰 수 있다. 그런 아이들은 어떤 선생이 와서 가르쳐도 보람차게 가르치고 당당하게 수고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애당초 공부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아이들, 엄마가 시키니 어쩔 수 없이 책상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공부에 동기가 부여된 상태로 만들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해야 한다. 웃기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고, 혼을 내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하고. 아무튼 어떻게 해서든 공부를 하겠다는 마음을 장착시켜야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과외는 낭비일 뿐이다. 시간낭비, 에너지 낭비, 돈 낭비. 그리고 보통은 그런 과외는 그 과외에 관계된 선생, 학생, 학생의 부모 모두가 자신들이 가진 것을 결실 없이 헛되이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서너 달 안에 끝이 나고 만다.


그렇게 서너 달 만에 끝날 것 같은 과외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중학교 3학년 남자아이였는데 산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부모가 자식을 제일 모른다고 내가 봐서는 해병대 급 강력한 훈육과 제재로 아이의 산만함을 바로잡아야 공부든 뭐든 할 수가 있을 텐데 아이의 엄마는 좋게 타이르면 말을 잘 들을 거라는 말만 반복하고 당신 아들과 똑같이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전철에 앉아서 애써 달래고 타일러 가며 한 페이지라도 더 가르쳐 보겠다고 목소리 높일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목이 아픈 것 같았다. 그때 문득 생각했다. 마치 미용실에서 파마할 때 머리에 쓰는 전기 모차처럼 생긴 어떤 전기 장치가 있어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 지식을 습득하려는 사람이 각각 그 모자를 쓰고 그 두 모자를 전선으로 연결하여 스위치를 켜기만 하면 순식간에 지식이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렇다면 얼마나 간단하고 쉬울까. 공부할 의지가 없는 아이를 가르치려고 지지고 복고 으르고 달래고 할 필요도 없이 함께 모자를 쓰고 스위치를 누르기만 하면 내 머리 속의 지식이 산만함으로 가득 찬 그 아이의 머리 속 어딘가로 전달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생각은 외국인들과 영어로 이야기하면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답답할 때도 떠올랐다. 그런 전기장치가 있어서 한순간에 영어를 네이티브 스피커처럼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르치고 배우는 힘든 과정 없이 지식이나 기술의 습득이 참으로 간단하고 쉬워질 테고,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돈을 받고 그 지식이나 기술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과 함께 모자를 써주기만 하면 되고,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공부를 하고 기술을 연마할 것이라는 허황된 생각.


써놓고 보니 글의 처음이 너무 길었다. 내가 하려고 하는 얘기는 지식과 기술인데 그 단어가 등장하기까지 두 단락이나 필요하다니 나의 글재주의 한계를 절감한다. 그렇다면 글재주가 뛰어난 가령 김영하 같은 작가와 함께 전기 모자를 쓰고 스위치를 누르면 그의 글재주가 나에게 고스란히 장착되어 나도 그처럼 감동적인 글을 술술 쓸 수 있을까?...... 실없는 생각을 한다.


각설하고 다시 지식과 기술 이야기에 집중하자면, 나의 매거진 "즐거운 식탁"에 내가 차린 밥상에 대한 글을 쓰고 글을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발행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키워드를 고른다. 나는 언제나 키워드 "요리"와 "음식"사이에서 갈등한다. 나에게 "음식"은 평범하게 늘 우리가 먹는 것이고 요리는 중국 요리나 프랑스 요리처럼 어쩐지 전문가의 지식과 기술이 들어간 것으로 여겨진다. 나에게 내가 만들어 상에 차린 것은 요리라기보다는 음식이다. 그러나 "음식", "음식 이야기"라는 키워드를 고를 수 없다. 만약 "음식", "음식 이야기"라는 키워드를 고르면 내 글은 브런치 어디에 떠돌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어, 읽는 이 없는 그야말로 나만의 글이 된다. "요리"라는 키워드를 달아서 발행하면 내 글은 요리/레시피 키워드로 분류된 글의 목록에 위치하게 된다. 분류된 목록에 노출되면 아무래도 독자들이 한 번이라도 더 읽을 가능성이 커진다. 언제나 글을 쓰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부끄럽다. 부끄러워서 너무 많은 사람이 내 글을 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읽고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이 두 마음 사이에서 잠시 갈등한다. 그리고 언제나 내 글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운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읽고, 조회수가 올라가고, "좋아요"가 많이 달리는 것을 바란다 하더라도 요리가 아닌 것에 "요리"라는 키워드를 붙일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차선으로 "집밥" 키워드를 단다. 집에서 해 먹는 밥이니 집밥이라고 한 것이 틀린 것도 아니고, "집밥" 키워드를 달면 "요리" 키워드와 같은 목록에 놓일 수 있다. 그런데 나의 매거진 "즐거운 식탁"에는 집밥이 아닌 밥상도 있다. 이럴 때 정말 어쩔 수 없이 "요리"라는 키워드를 붙일 수밖에 없다. 아쉬운 순간이다.


그래서 사전을 찾아봤다. 도대체 "음식"과 "요리"의 차이가 무엇인지.


음식: 사람이 먹고 마실 수 있는 모든 것

요리: 여러 가지 재료를 알맞게 맞추어 적절한 방식으로 음식을 만듦


다음 어학사전에는 저렇게 나와있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사과는 음식이고 사과로 사과파이를 만드는 것이 요리다. 음식은 명사, 먹을 수 있는 무엇이고 요리는 동사, "요리하다"에 가까운 것 같다. 사전적 의미에 따른다면 음식에 관한 글도 많은데 브런치 운영팀에서 요리/레시피 키워드를 음식/요리/레시피로 바꾸어서 "요리"와 "음식"사이에서 갈등하는 내 마음의 긴장을 좀 덜어주었으면 좋겠다. 갈등 없이 음식은 "음식" 키워드를 달고, 요리는 "요리" 키워드를 달 수 있도록.  


디저트는 사진을 찍지않았다. 내가 직접 만들지 않아서. 내가 한 요리가 아니므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이던 지난 3월 재택근무를 하면서 너무나 답답하여 뭔가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에 아무 날도 아닌데 코스요리를 해 봤다. 나름 지식과 기술을 동원한 다 계획이 있는 "요리"다. 고추장 육회로 입맛을 돋우고, 봉골레 파스타로 배를 어느 정도 채운 다음,  대파 크림소스에 흙 우럭과 전복을 제철 야채인 꽈리고추, 햇마늘, 햇양파를 곁들여 제 맛을 음미하고, 노브랜드에서 사 온 티라미수로 입을 정리하는 순서다. 이 식탁을 차리면서 "이번에는 아무 갈등 없이 당당히 "요리"라는 키워드를 달 수 있겠군" 생각했었다. "요리, 나도 해봤어" 이러면서.


이쯤에서 글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글을 쓰다 보니 내가 예전에 생각했던 지식과 기술을 순식간에 전달해 주는 전기 모자 장치가 새삼 흥미롭게 다가온다. 만약 그런 전기 모자 장치가 있어서 작가 김영하에게 당신의 글재주를 나도 가지고자 하니 나와 함께 모자를 써주십사 부탁한다면 그는 무엇을 요구할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채 재능기부처럼 마구 마구 여러 사람들과 모자를 함께 쓸까? 아니면 엄청 값나가는 무언가를 내놓으라고 할까? 어쩌면 아무와도 함께 모자를 쓰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라면 어떨까? 나에게 만약 누구라도 탐낼 지식과 기술이 있다면 나는 과연 다른 이들과 함께 전기 모자를 쓰고 내 지식과 기술을 내어줄까? 내 지식과 기술과 맞먹는 그 무언가로 무엇을 원하게 될까?...... 또 실없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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