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나의 신데렐라 구두가 있는 곳, 제주
2019. 6. 제주여행 1
제주에 다녀왔다. 초여름의 제주는 푸르고 아름다웠다. 유월의 햇살에 바다는 투명하게 빛나고, 숲은 물기를 머금은 싱그러움을 뿜어 내고 있었다. 행복했다. 나에게 제주는 그런 곳이다.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끼는 곳.
스물의 시절엔 여행을 하지 못했다. 어학연수를 다녀온 뉴올리언스를 제외하면 고작 일박 이일로 다녀오는 엠티가 내 일상을 떠나는 것의 전부였다. 나의 시간과 돈은 학교와 아르바이트 그리고 나의 옥탑방을 오가는 것에만 집중해야 딱 맞았다. 방학에 캐나다로 스키여행을 갔다 왔다는 선배와, 주말을 이용해 홍콩에 다녀왔다는 동기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참 놀랐다. 꼭 필요하지 않은 곳에 많은 돈과 시간을 쓰는 사람들이 바로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수업을 듣고 같이 밥을 먹는 사람들이라니. 나는 대학원 등록금을 마련하고 월세를 내기 위해 일주일에 세 번은 멀리까지 버스를 타고 가 중고등학생들의 시험공부를 봐주고, 밤늦게 나의 자취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나 피곤한 몸을 누이는 대신 피곤을 잊기 위해 한 주전자의 커피를 내려 다음 날 발표수업을 준비해야 했다. 그 시절엔 정말 하루 종일 도서관에 앉아서 공부하는 게 소원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시간도 늘 쪼개서 사용하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매일 동그라미를 그리고 시간을 나눠놓은 계획표를 세워가며 그것에 맞추어 살았다.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지만, 돈이 없으면 피곤한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피곤함 따위 괜찮았다. 씩씩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가난하다고 느꼈지만 그 가난이 나를 불쌍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나는 젊었고, 세상에 대해 자신만만했다.
어느 밤 대학 동아리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서로의 근황과 사적인 이야기가 돌고 있었고, 누군가 제주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때 알았다. 스무여섯 해를 사는 동안 나는 제주에 가 보지 못했다는 것을. 촘촘히 짜인 하루에서 다른 하루로 넘어가기 바빠 나는 제주도 가보지 못하고 살고 있구나 싶어서, 내가 조금은 가엾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제주에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어이 가보고 싶어 졌다. 나는 아직 제주에 못 갔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고 꼭 제주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서로 자신이 경험했던 제주를 이야기했다. 그러다 결혼을 앞둔 선배 이야기가 나오고, 나는 나를 제주에 제일 먼저 데려가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선배 하나가 어떻게 그런 속물적인 이야기를 하냐고, 정주영 같은 사람이 너를 제주도에 데려가면 너는 그 사람과 결혼할 거냐고, 나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정말 어이가 없고 자존심이 상했다. 우리가 사회과학 세미나를 하는 것도 아니고, 표현을 "데려간다"라고 했지만 결국 내 말의 의미는 "나는 결혼하고 싶은 사람과 나의 첫 제주 여행을 하고 싶다"는 의도였는데 마치 나를 돈이면 다 되는 사람으로 취급했다. 불쾌하고 화가 나서 '내 마음이 그렇다는데 네가 어쩔 거냐고'라는 태도를 불손하게 보였던 것 같다.
그 선배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나는 제주 이야기가 나오면 "나를 제주에 처음 데려가는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다소 독립적인 성격의 사람이 할 법한 소리가 아닌 말를 했다. "내 돈 내고 가면 되지 꼭 누가 데려가야 하나?"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좀 그런 대접을 받아보고 싶었다. 누군가 다른 이의 보살핌을 받아보고 싶었다. 매일 촘촘하게 나누어진 계획표의 시간에서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공부를 하고 무언가 계속 애쓰며 보내는 시간에서 벗어나 무위를 즐기고 싶었다. 어쩌면 나는 조금 지쳐있었나 보다. 나의 남자 친구는 그런 나를 알고 있었을까? 그는 싱가포르에서 날아와 나에게 두 팔 가득 꽃을 안겨주고, 밤이면 도둑고양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나의 가난한 옥탑방에서 내 허리를 감싸 안고 나를 제주로 데려갔다. 그 여행은 프러포즈와 같았고, 나는 행복하게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나에게 제주는 나의 신데렐라 구두가 떨어진 곳이다. 행복이라는 주문에 걸려 왕자님과 춤을 추다 현실로 후다닥 돌아왔지만, 그곳엔 내가 다시 공주로 돌아갈 수 있는 구두가 있다. 그곳에 가면 우리가 다시 스물의 설레던 시절로 돌아가는 듯하다. 그래서 늘 제주는 설레고 행복한 곳이다. 게다가 아름답기까지 하다. 이 번 여행도 아름다웠다. 그와 함께 앉아서 제주의 그 예쁜 바다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