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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Sep 21. 2019

나에게 당당한 속도로 걷기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러닝머신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 속도를 6.0에 맞추어 놓고 걷기를 하면 시간과 거리가 같은 숫자로 올라간다. 10분에 1km를 걷게 된다. 시간은 09:24(min/sec), 거리는 9.240km 이렇게 동시에 똑같은 숫자가 나열된다. 나는 이 사실을 얼마 전에 알았다. 그동안 나는 5.0에서 5분 걸어 웜업 한 뒤 속도를 올려 5.5에서 55분을 더 걸었다. 그건 나에게 너무 느린 속도였다. 너무 느리게 걸어서 오래 걸어야만 했다. 스스로를 너무 살살 다룬 것이다.


수많은 하루키의 소설 중 제대로 읽은 것은 "상실의 시대"로 번역되어 나온 "노르웨이의 숲" 한 권뿐이다. 세상에 대한 내 이해의 폭이 좁고, 나의 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탓인지 그의 소설을 읽어내는 것이 나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그의 장편은 '이번에는 진득이 읽어야지'하고 자리를 잡고 앉아 한참을 읽다 도저히 읽을 수 없어 집어던져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가장 최근에 읽으려고 노력했던 그의 소설은 "태엽 감는 새"였는데 이 역시도 읽다가 포기했다. 이 소설 속 주인공 남자의 아내는 좋아하지 않는 남자 때문에 남편을 떠나고, 혼자 남은 남자 주인공은 집 근처 말라버린 우물에 스스로를 가두고, 평범하지 않은 모습과 정신세계를 가진 자매가 갑자기 주인공 남자에게 접근한다. 여기까지 읽고 이 소설도 더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자연스럽게 페이지를 넘기며 이야기를 즐기기에는 너무나 갑작스럽고 부자연스러운 우연이 계속해서 나열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노르웨이 숲"을 읽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하루키 소설의 남자 주인공 곁의 여자들은 모두 그 남자 주인공과 아주 쉽게 관계를 맺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하루키가 젊은 시절 이성에게 인기가 없어서 그 한풀이를 소설에서 하나 싶은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독자를 가진 작가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순전히 나의 책 읽기가 편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소설을 미처 다 읽지 못하고 읽기를 그만두고 싶을 때 '나는 그의 소설에 맞는 플러그를 갖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 짐을 부리고 이제 뭘 좀 할까 싶어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으려 하는데 맞는 플러그가 없어서 포기하는 느낌. 나에게는 하루키의 소설에 맞는 플러그가 없다. 그렇다! 나는 그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산문은 다르다. 나는 그의 산문을 즐겨 읽는다. 그가 쓴 산문을 읽고 있으면 읽는 이에 대한 그의 깊은 배려심이 느껴진다.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적확한 언어로 전달하여, 독자가 조금의 오해와 왜곡 없이 온전히 자신이 전하고픈 것을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읽힌다. 그가 찍어놓은 방점에서,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한 의도가 느껴지는, 문장 속에 살포시 끼어 있는 괄호 안의 설명에서 다정하게 조곤조곤 말하는 그의 말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번에 읽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는 '가능한 한 친밀한 말투로 이야기한다는 설정'으로 원고를 썼다고 하니 그런 느낌이 더 했다. 그리고 그의 자신만만함을 느꼈다. 긴 시간 자기 자신에게 부끄럼 없이 당당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아우라가 문장 사이에서 마구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스스로 자전적 에세이가 될 것 같다고 했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하루키는 문단과 떨어져 살고 있었던 그가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는지, 무엇을 써야 하는지, 창조적인 작품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났고 또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소설을 쓰면서 고민하여 도달한 결론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어느 봄날 야구장 외야에 드러누워 프로 야구 개막 경기를 보다 계시처럼 소설을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생전 처음 쓴 소설이 문학지에서 주는 신인상을 받는다. 심지어 자신이 신인상을 받으리라고 예상도 했다고 한다. 게다가 삼십오 년 동안 소설을 써오면서 슬럼프 없이, '쓰고 싶은데 써지지 않는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단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인 나로서는 뭐랄까, 좀 재수 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이야기가 '내가 이 정도로 잘난 사람이다'라고 으스대는 잘난 척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그의 진지함 때문이었다.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대단히 진지하고 철저하게 대하는 그의 태도가 그 모든 것을 진실하게 만들었다. 단조롭고 고집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그래서 고단하지만 그 고단함 따위 아무 변명거리가 되지 않는, 내가 정한 원칙을 지키는 한결같음. 하루키는 소설 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난 뒤부터 삼십오 년 동안 한결같이 하루에 한 시간씩 달리기나 수영을 하고, 일 년에 한 번은 마라톤이나 철인 레이스에 참가하고, 하루 다섯 시간은 글을 썼다고 했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슬럼프가 없었다고, 소설이 써지지 않으면 번역을 하고, 에세이를 쓰고 '아무튼' 그렇게 매일 달리고, 매일 썼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전 세계에 출판된 엄청난 수의 책. 나는 그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지만 자신이 정한 삶의 방식을 진지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지켜나가는 그의 한결같음에서 나오는 당당함이 좋다.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정직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당당함과 잘 남에 경의를 표한다.


나는 이제 속도 6.0으로 40:00분 동안 4.000km를 걷고 속도 4.0으로 5분을 더 걷는다. 그럼 걷는 동안 대략 200kcal를 소모했다고 러닝머신에 표시된다. 이 속도가 과연 나에게 맞는 속도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걷지 말고 달려야 하는데 나는 달리는 것이 힘들 것 같아 엄살을 부리며 걷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늘 눈치를 본다. 내가 나를 너무 살살 다루는 것은 아닐까,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속도를 찾아 내 '아무튼' 달리는 하루키의 그 잘 남을 생각하며 내 오늘의 걷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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