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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dache Jun 24. 2019

드디어 다 읽었네......

김영하 "여행의 이유"

김영하의 소설은 잘 읽힌다. 한 번 잡으면 놓을 수 없다.


나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기계를 두려워한다. 어쩌면 기계가 싫어하는 사람이 나일지도 모른다. 내가 곁에 가면 복사기가 고장 나고 컴퓨터가 오작동을 한다. 그래서 나는 그 흔한 폰뱅킹도 하지 않고,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터넷 뱅킹도 자주 하지 않는다. 나는 기계치다. 이런 기계치인 내가 전자책 프로그램을 컴퓨터에 다운로드한 뒤, 신용카드를 꺼내 전자책을 산 유일한 작가가 김영하다. 나로 하여금 그 모든 두려움과 귀찮음을 극복하고 전자책을 주문케 한 작가, 인터넷 서점의 당일배송도 기다리지 못할 만큼 어서 빨리 그 모든 이야기를 읽어보고 싶었던 책의 저자. 내가 전자책으로 읽은 그의 책은 "오빠가 돌아왔다"와 "살인자의 기억법"이다. 그러나 소설집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가 나에게는 그의 책 중 단연 으뜸인 소설집이다. "검은 꽃"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쓸쓸하고도 따뜻한 여운에 싸여 잠시 그 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런 여운은 내 옆구리를 간질거리며 무언가를 쓰고 싶은 즐거움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리고 책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김영하를 만난, 당장 피렌체행 비행기표를 끊어 그곳에 가 짐을 부리고 한 달 정도는 살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솟구쳤던 알쓸신잡 3. 낯선 곳에서 여유로운 그의 웃음소리와 목소리에서 그의 문장이 들리는 듯했다. 그 프로그램을 다시 보기로 보고 또 보면서 나만의 피렌체 여행을 상상했다. 그래서 그가 "여행의 이유"라는 책을 출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기뻤다. 그의 여행의 경험을 책을 통해 공유할 수 있으리라 기대가 컸다.


그런데 막상 그의 새 책을 읽으니 읽기가 뚝뚝 끊겼다. 한 번에 훅 읽어나갈 줄 알았는데 나는 몇 번이나 책을 덮고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그의 책을 못 다 읽은 채로 오월이 끝나고 유월이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글을 쓸 수 없었다. 책을 덮고 빠져드는 상념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 못해  답답했다. 설득력 있는 유려함과 깊은 곳에서 반짝거리는 지식의 여유가 내 손을 이끌고 그의 문장 속을 달리는데 어느 순간 나는 그 손을 놓고 책을 덮고 있었다. 왜? 무엇 때문에?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나 역시 답답했다.


엄마는 남동생과 나를 무척 호되게 혼냈다. 동네에 소문이 날 정도였다. 칠 남매 맏며느리로서 아버지의 박봉으로 시동생들까지 신경 써 가며 빠듯한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이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자식들까지 속을 썩이거나, 손이 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는지 엄마는 무척 엄하게 우리를 대했다. 우리가 잘못을 하면 회초리가 따로 있지 않아서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 때렸다. 나는 잘못했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엄마의 매를 피해 도망을 가거나, 엄마 손을 붙잡고 비는 아이가 아니었다. 때리면 그 자리에서 그 매를 다 맞아 내고 있었다. 혼을 내는 엄마 입장에서는 그 모습이 괘씸하고 더 화가 났을 것이다. 너무 화가 난 엄마는 집을 나가라고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며 나를 쫓아내기도 했다. 때로는 혼자였고 때로는 남동생과 함께였다. 아직도 기억난다. 동생과 함께 쫓겨난 밤, 동생의 손을 잡고 말없이 골목을 걷고 걷다 냇가에 앉아있는데 불빛이 물 위에 어른거렸다. 그 어른거림에 멀미가 날 듯했다. 갈 곳 없는 처량함과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암담함이 목구멍으로 역류하여 토할 것만 같았다. 그때가 열 살이었나 열한 살이었나 싶다. 엄마의 그런 훈육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이 내가 영원히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불안함을 안겨주었다. 아버지는 자주 출장 중이었고, 아버지의 부재와 팍팍한 생활에 지쳐있는 엄마는 무서웠고 동시에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나는 불안했다.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될 수 있으면 집에서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누구도 날 쫓아낼 수 없는 곳에 튼튼히 뿌리내릴 수 있는 나의 집을 갖고 싶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책 내용을 내 마음대로 단순화시키자면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에서 일상의 상처가 있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오직 현재를 즐기기 위해 원래부터 그곳에 있던 사람들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여행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큰 부분을 차치한다고 했다. 여행과 여행자 그리고 여행지에 대한 통찰이 작가 개인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글에서 얻은 이해로 깊이 있게 그리고 분방하게 펼쳐진다.


그의 책을 읽으며 나의 여행을 생각했다. 내가 했던 여행은 어쩌면 누구도 쫓아낼 수 없는 튼튼한 나의 집을 지을 곳에 대한 탐색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여행을 가, 그곳이 마음에 들면 장을 봐, 밥을 해 먹으며 그곳에서 일상을 살고 싶어 진다. 마카오에서도 오키나와 비세 마을에서도 얼마 전 다녀왔던 제주의 하도에서도.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누비다 마음에 드는 아무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오후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 들러 찬거리를 사 소박하지만 정갈한 상을 차려내는 하루를 그곳에서 살고 싶었다. 늘 그렇다. '이곳에서 행복하구나'하는 맘이 들면 어김없이 그곳에서 잠을 깨고, 밥을 해 먹고, 산책을 하는 상상을 한다. 그곳에 살고 싶다. 아무도 쫓아내지 못하는 튼튼하고 행복한 나의 일상을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김영하의 표현대로 "상처를 몽땅 흡수한" 지금의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서 다시 상처 없는 일상을 시작하는 것. 아마도 나에게 여행은 그러하다. 그러나 상처 없는 일상은 존재할 수 없고 나는 다시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와 여행에서 느꼈던 행복감을 거름 삼아 내 상처를 보듬는 하루하루를 또 살아간다. 나를 혼내고 쫓아냈던 엄마에 대한 기억도 이제는 잘 보이지도 않는 흐릿한 상처의 흔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제 김영하의 책을 읽으며 느꼈던 답답함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아마도 글쓰기에 대한 고민이었으리라. 브런치에 열심히 글을 쓰겠다 마음먹고 일주일에 한 번씩 글을 올렸다. 그런데 뭔가 나의 글쓰기가 풍성해진다는 생각보다는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나를 내보이는 것 이외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회의가 들었다. 그래서 뭔가 내 이야기가 아닌 내가 지어낸 이야기를 써보면 어떨까 이런 기분 좋은 설렘에 휩싸여 있었는데, 김영하의 책을 읽으면서 그 설렘이 좌절감으로 가라앉았다. '역시 책이란 소설이란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닌가 보다'라는 현실 인식이 몰려왔다. 헛웃음이 났다. 이번 김영하의 책은 나의 옆구리를 간질어 무언가를 쓰게 하기보다는 나의 순진하고 자기중심적인 내면에 도끼질을 날렸다. 그래서 좋다.


그리고 이제 나는 다시 생각한다. 무엇을 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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