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기 그 첫 번 째

사려니 오름 숲길

by headache

나의 새 해 다짐과 계획은 몇 년간 줄곧

1. 다정한 아내가 되자

2. 친절한 엄마가 되자

이 두 가지였다.


육아와 직장생활에 지쳐 나는 남편에게 짜증내고 아이들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반성했고 나아지기 위해 몇 년 간 다정한 아내와 친절한 엄마가 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했다. 나의 노력이 처음의 굳은 결심처럼 지속되었는지 그리고 모두를 만족시켰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노력했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좋은 아내와 엄마로 인정받고 싶었다. 남편과 다투고 냉랭한 시간이 길어지면 나를 슬프게 했던 생각은 아무도 나를 여자로 좋아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외로움이었다. 누구가 나를 좋아해 주지 않으면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인 듯 슬프고 외로웠다. 어려서부터 나는 줄곧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다. 자랑스러운 딸이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했고, 좋은 아내가 되고 싶어 남편의 도시락을 열심히 샀고, 정말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애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년간 다정한 아내 친절한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한 또는 노력한다고 믿었던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그리고 올해 나는 이렇게 변했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따위 필요 없어.

내가 나를 사랑하면 그뿐.

다른 이와의 관계에서 나를 바라보지 말고 나의 행복에 집중하자.

아내와 엄마가 행복하다면 나의 남편과 아이들도 다행으로 생각할 거야.

그리고 오직 나만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


1. 텃밭

2. 막걸리 담그기
3. 계절별로 제주 오름 오르기
4. 자주 글쓰기

네 가지 중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이 제주 오름 오르기다. 삼월 초에 항공권과 호텔을 예약하고 제주 오름에 관한 책도 주문했다. 그리고 오월에 산림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5월 16일에서 10월 30일까지 입장이 허락되는 사려니오름 탐방을 예약했다. 5월 20일. 드디어 이곳에 왔다. 삼월부터 준비한 이 숲과의 만남이 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지난 가을과 겨울 그리고 이른 봄까지 사람들의 발길을 막아 저 혼자 깊어진 숲은 흐린 날 물기를 머금어 아름답고 고요하다. 그리고 내 속 깊은 곳까지 차갑고 싱그러운 숲의 냄새를 전한다. 나는 이 숲에서 몹시 흥분되고, 힘이 넘쳐난다. 이 숲 속이 우주의 전부이고 존재하는 이는 나뿐인 듯 참으로 아름다운 이 숲에서 나는 특별한 무엇이 되어있다. 제주의 비바람과 햇살에 저절로 깊어져 웅장하고 포근한 이 숲에서 나는 나로서 행복하다.

2.png?type=w773 숲의 시작. 꽃길이다.
4.png?type=w773 이 숲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마음이 저절로 경계를 풀고 너그러워져 서로를 더 잘 이해하는 산책길.
7.png?type=w773 삼나무 껍질에는 지의류가 포근하게 덮여있다. 여기서 산소가 뿜어져 나온단다.
8.png?type=w773 아름다운 사려니 숲길. 걸어도 걸어도 계속해서 아름다운 숲길이 계속된다.
9.png?type=w773 아름다운 길을 따라 걸어오니 삼나무 전시림 입구에 다다른다.
10.png?type=w773 삼나무 전시림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아무도 지나 간 적이 없는 듯한 신비로운 길이 시작된다.
12.png?type=w773 키 큰 삼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숲
13.png?type=w773 이 숲에 우리뿐인 듯 우리는 다른 세상으로 들어온 듯 아름답다.
14.png?type=w773 사려니오름으로 가기 위해 숲길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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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니 오름은 그 전체적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마도 숲과 함께 한 데 어울려 있어 평지에 오롯이 솟아 있는 다른 오름과 달리 그 모습을 한눈에 보기가 어려운 것 같다. 건강하고 튼튼한 나무들이 들어찬 숲길을 오르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고 빗방울이 떨어진다. 어두워진 숲에서 잠깐 무서운 생각이 든다. 그러나 금세 나타난 정상에서 탁 트인 시야로 저 멀리 제주의 바다까지 보이니 상쾌하고 뿌듯하다. 오래 걸어 피곤한 다리를 쉬어 계속 머무르고 싶은 이 숲을 떠난다. 이 숲을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쉽다.


막내는 이렇게 오래 걸어야 하냐고 불평이고, 남편은 비 오고 바람 부는 날씨에 오래 걸어서 살짝 감기 기운이 있다. 그러나 나는 참 좋다. 미안하지만 아니 별로 미안하지도 않다. 나의 행복을 위해 이 여행을 계획하고 이 숲으로 데려온 것을 미안해하지 않기로 한다. 올해는 나의 행복에 집중하기로 계획했으므로 나는 미안해하지 않기로 한다.

1.png?type=w773 사려니 오름 입구에서 계단이 시작된다.
2.png?type=w773 콩짜개란은 멸종 위기인데 사려니 숲에는 지천으로 있다더니 정말 그렇다.
3.png?type=w773 숲속의 길은 사람이 다니는 곳이다. 그 숲에 사람의 출입을 제한했더니 건강한 나무의 뿌리가 그곳까지 뻗어 나와있다.


4.png?type=w773 길을 덮고 있는 나무뿌리. 이 숲은 제 것이라고 으스대는 모습이다. 보기 좋다.
7.png?type=w773 신비로운 기운을 뿜어내는 나무도 만난다.


13.png?type=w773 드디어 사려니 오름의 정상. 저 멀리 비구름이 내려앉은 한라산이 보인다.


8.png?type=w773 반대편으로 제주의 바다가 흐린 하늘에 가렸다. 날이 좋았다면 경치가 더 좋았으리라


9.png?type=w773 가파른 계단으로 사려니 오름을 내려온다. 이 숲을 벗어나는 것이 아쉬워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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