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색이 흐려진다.

정답이 없는 관점.

by 해다니

초등학생 시절, 나는 친구들과 조금 달랐다.


미술시간 주제는 풍경화.

꽃이 핀 들판을 그려야 한다고 했다.


초록색 들판, 파란 하늘, 하얀 뭉게구름.

빨간 지붕에 하얀 벽으로 이루어진 집 하나.

그리고 분홍색과 빨간색 꽃들,

그 옆으로 날아가는 노란색 나비 한 마리.


우리는 그렇게 그리지 않으면 '별종'이라 불렸다.


왜?

왜 그렇게 그려야 하지?

왜 모두가 똑같은 그림을 그리고, 똑같은 색을 써야 하지?


나는 그게 싫었다.

특출 나게 잘 그리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감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똑같은 방식은 더 싫었다.


그리고 나의 '별종' 그림은 안 좋은 점수로 돌아왔다.


'아, 결국 모두가 같아야 하는구나.'

그 시절, 우리는 같아야 한다는 기준과

달라도 괜찮다는 말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얼마 전, 원데이 클래스에서 꽃다발을 만드는 수업을 들었다.


선생님은 말했다.

큰 꽃과 작은 꽃을 높낮이를 달리해 배치하고,

중간에 기다란 초록 잎들을 자연스럽게 넣으라고,

그것이 들판에 핀 꽃 같은 프렌치 스타일이라 말하셨다.


하지만 내 손은 자꾸만 원형의 부케를 만들고 있었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었지만,

내가 어릴 적 봐왔던 스타일은 그랬다.

부드럽고 동그란 유행 지난 스타일.


이상하게도 촌스럽게 만들어진 그 꽃다발이 마음에 들었다.


선생님은 말했다.

"조금 다듬어줄게요."


내 꽃다발은 선생님의 손을 지나며 바뀌어갔다.

높낮이가 생기고, 초록잎이 자유롭게 꽂혔다.

결국, 샘플과 비슷한 조화로운 꽃다발이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전문가의 솜씨가 들어간 꽃다발이 예쁘긴 했다.

하지만 그건 더 이상 '내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의 색이 담겼고, 나의 색이 죽었다.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미완성으로 남은 내 그림에 선생님의 붓이 스치면

그 순간은 아름다웠지만, 그 결과가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지 않았다.


선생님의 붓터치가 지나가면, 나의 그림은 틀린 답 같아서

미술시간이 조금 싫어졌다.


정답 없는 예술에

너의 색이 담기면, 나의 색이 죽는다.

그것이 정말 '배움'일까?

혹은, 내가 나를 잃어가는 과정은 아닐까?


배움이란,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시선이 살아 있는 상태로 남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름답게 정돈된 결과보다,

그것을 만든 사람의 흔적과 감정이 살아 있는 것이

진짜 나의 작품이다.


이전 11화가능성 중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