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강철과 하얀 눈이 만나는 곳
나는 강철 모발을 가지고 태어났다.
어찌나 억센지, 학창 시절 손으로 머리를 훑을 때면 한두 가닥이 손바닥에 가시처럼 박혀있곤 했었다.
가위질을 힘겨워하던 미용사들은 늘 같은 말을 했다.
"학생, 그래도 이 머리 나이 들면 다들 부러워해."
도대체 그날이 언제 오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그 억센 머리카락들이 어느 순간부터 박히지 않더니,
이제는 그저 바닥으로 떨어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하얀 눈송이가 하나둘 내려앉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강철 모발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 아들은 나를 쏙 빼닮아 아주 풍성하게 태어났다.
배냇머리조차 없어 맨들맨들한 영국 아기들 사이에서, 숱이 검고 빽빽한 우리 아들의 머리는 단연 독보적이다. 어딜 가나 "머리숱이 정말 풍성하다(He has so much hair!)"는 감탄을 듣는다.
내게서 점점 희미해져 가는 그 억센 성질이 고스란히 아들에게 넘겨진 것만 같다.
아들은 지난여름, 이 강철의 뿌리를 한국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그는 지금 내 나이 때, 정말이지 불가사의한 체력의 소유자였다.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이고도 멀쩡한 얼굴로 출근하시던 분...
그 시절 그의 머리카락은 지금의 나보다, 아니 우리 아들보다도 더 검푸렀다.
그랬던 그가 매일 오후면 어김없이 낮잠을 청하는 모습을 마주했다. 곤히 자는 그의 머리 위에는 검은 강철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내려앉은 흰 눈만 소복이 쌓여있었다.
아장아장 온 집안을 누비는 우리 아들의 검은 머리.
오늘 아침 거울을 보며 뽑아낸 나의 흰머리.
이 모든 게 낮잠을 주무시던 그를 떠올리게 만든다.
날이 갈수록 검고 무성해지는 아들의 머리.
이제는 힘없이 하얗게 바래진 그의 머리.
그런 아들을 품에 안고 환하게 웃으시는 아버지...
흑백의 대비 위로, 세월이 겹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