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

아직도 나는 갈 길이 먼 어른

by 헤아림꾼
0*slT2QTStosZ_AsSN Photo by Adrian Diaz on Unsplash

학창 시절, 한 통신사의 '0.3초의 기적'이라는 광고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하철이 들어오는 순간 한 꼬마가 선로로 떨어졌다. 모두가 얼어붙은 찰나, 반대편 선로에서 내 또래의 소년이 튀어나와 꼬마를 낚아채고 다시 돌아갔다. 전광석화 같은 그의 움직임 뒤로 브라운관 특유의 지지직거리는 잔상이 보였다. 그 잔상은 내 가슴에 도달할 때쯤, 동경 같은 질투로 변해있었다. '나도 저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데 기회가 없네'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등하굣길에 위험에 처한 사람이 없는지 두리번거리곤 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십 년이 흘렀다. 그사이 나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영국으로 건너왔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흐릿한 브라운관으로 보았던 그 소년의 용기는 이제 내 머릿속에서 선명한 OLED로 재생된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저기에 있었으면...’ 하고 열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거기에 없어서 다행이다’라고 안도한다. 0.3초라는 기적을 꿈꾸기에는 너무 꽁꽁 얼어버렸다.


여느 날처럼 북적북적한 기차를 타고 출근하던 길이었다.


'쿵!'


둔탁한 소리에 놀라 고개를 빼꼼 내어보았다. 바닥에 머리를 보라색으로 물들인 한 여학생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뭐지? 마약쟁이인가? 아니면 내가 잘 모르는 요즘 세대들의 장난인가?’


주변 눈치를 살폈지만 다들 멀뚱멀뚱 쳐다만 볼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때, 바닥에 쓰러진 학생의 눈이 흰자위를 보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 이거 기절이구나.’


수차례 돌렸던 시뮬레이션의 영향인지 반사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학생 옆으로 다가가서 앉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기억 저편에 분명 민방위 교육의 파편들이 가라앉아 있었으나 바로 앞에서 움찔거리는 학생을 보니 도저히 건져 올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 양손은 허공에서 갈 곳을 몰랐다. 다급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주위 사람들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999라도 불러야 하려나요? (Should we call 999?)”

확신이 없다 보니 말끝이 저절로 올라갔다. 돌아오는 건 영국인 특유의 어색한 미소뿐이었다.


‘이거 진짜 어떻게 해야 되지…?’


그때, 한 중년 아저씨가 다가오더니 흔들림 없는 양손으로 학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의식을 확인했다. 학생은 여전히 몸을 움찔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 없었다. 아저씨는 나를 바라보며 상황이 심각하면 다음 역에서 학생을 내려야 할 수도 있으니, 빨리 가서 기차 직원에게 알려달라고 했다.


그제야 허공을 떠돌던 내 양손이 갈 길을 찾았다.


우리 차량은 하필이면 맨 중앙에 있었다. 나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Sorry. Sorry.)'를 주문처럼 웅얼거리며 인파를 비집고 나아갔다. 아무리 나아가도 직원은 보이지 않았고 결국 열차 맨 끝에 있는 승무원실에 도달했다.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며 외쳤다.


"사람이 쓰러졌어요. 빨리 와서 도와주세요! (Hey, someone just passed out. Could you help us please?)"


화들짝 놀란 승무원이 나와 어디냐고 물었다. 중앙 차량이고 서둘러야 된다 말하자 그가 "비상사태! (Emergency!)"라고 외치며 걷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아까는 비집고 뚫어야 했던 인파가 홍해처럼 갈라졌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그를 따라 걸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학생은 더 이상 누워있지 않았다. 작은 텀블러를 꼭 쥔 채 고개를 푹 숙이고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아까 그 아저씨는 곁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다독여주고 있었다.


승무원은 무전으로 상황을 기관사에게 알렸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기차는 다음 역에 정차했다. 승무원과 아저씨는 학생에게 이름 같은 가벼운 질문을 하며 대화를 유도했고, 학생은 하나 둘 천천히 대답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일단락된 거 같다는 생각에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갔다.


곧 기차가 출발하자 학생은 아저씨에게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승무원은 아저씨를 영웅이라고 치켜세우며 어깨를 두드렸다. 내 자리에서 그 훈훈한 광경을 보며 마음이 놓였는데...


가만 생각하니, 그 누구도 나한테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


뭐, 학생이야 기절한 상태라서 나를 못 봤을 수도 있다. 근데 최초로 조치를 취하려고 한 데다, 열차 중간에서 끝까지 인파를 뚫고 나아가 직원을 찾아 돌아온 나에게 아무도 고맙다는 말을 안 하다니...


어딘가 분명히 잘못된 거 같았다.


팔짱을 끼고 이런 상황에서는 도대체 누구한테 감사 인사를 받아야 되는 건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감사 인사를 받자고 한 일은 절대 아니다. 애초에 몸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반사적으로 나갔다. 게다가 나는 아저씨에 비하면 딱히 한 것도 없다.


"저기 죄송합니다. 아까 기절하셔서 기억은 안 나시겠지만 참고로 제가 제일 먼저 일어나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직원에게 알린 것도 접니다. 그러니 저한테도 조금이나마 감사를 표현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분명히 선행을 베풀었는데 어딘가 석연치 않은 이 느낌...


그 찝찝함의 근원을 파악하고자 하는 위원회가 머릿속에서 열렸다. 하지만 그 어떤 위원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고 회의는 오히려 나의 미숙한 대처에 대해 추궁하는 청문회로 변해버렸다. 이렇게 중요한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인데 기차는 회사 근처 역에 도착하고 말았다.


양손을 패딩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기차에서 내렸다. 고개를 푹 숙이며 깊은 한숨과 함께 회사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역의 출구를 나서는 순간, 아까 승무원이 왼손을 크게 휘저으며 나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이봐, 아까 진짜 잘했어! (Hey, that was very nice of you!)"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만 슬쩍 돌려 그와 눈을 맞췄다. 옅은 미소와 함께 살며시 엄지를 내보였다. 그러자 그도 엄지와 미소로 화답했다.


고개를 다시 회사로 돌렸지만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난 아직도 멀었나 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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