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쫓는 두 사람과 유일한 목격자
올해 들어 매주 토요일에 출근하다 보니, 가족들과 하는 일요일 마트 나들이가 꽤나 거창한 외출이 되었다. 토스트와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가 차려진 아침 식탁에 앉자 아내가 물었다.
"나중에 마트 갈 때, 시내로 갈 거야? 아니면 외곽으로 갈 거야?"
사소해 보이지만 이건 우리 부부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다. 시내 매장과 달리, 외곽 매장에서는 다 쓴 아기 용품을 가져가면 £10어치 물건을 살 때마다 £5를 돌려주는 쏠쏠한 재활용 이벤트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10분만 더 걸어가면 무려 £5를 버는 셈이다.
딸기 잼이 발린 토스트를 한입 베어 물며 대답했다.
"...로 가자. 마침 바디워시랑 샴푸도 사야 하고..."
내 머릿속의 블랙박스에는 분명 저 첫 번째 말줄임표 자리에 '외곽'이라는 단어가 또렷하게 녹음되어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내 입이 실제로 어떤 단어를 내뱉어냈는지는 지금도 100% 장담할 수가 없다. 내 대답에 아내는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적어도 현관문을 나서기 전까지는...
외출 준비를 마치고 아들을 품에 안으며 물었다.
"재활용할 물건들 챙겼어?"
아내가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황당하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안 챙겼는데? 네가 아까 시내로 간다며!"
"내가? 언제?"
내 반문에 아내의 미간이 좁혀지며 아내 이름을 따서 라인이라 붙여준 특유의 주름이 생겼다.
"너 아까 내가 물어볼 때 제대로 안 들었지?"
"내가 실수로 잘못 말했나 보지... 그럼 확인할 겸 다시 물어보지 그랬어?"
"아니, 그럼 대화할 때마다 내가 매번 다시 확인을 해야 돼?"
"야, 나랑 5년을 넘게 지냈으면 이제 슬슬 내가 얼마나 실수를 연발하는 사람인지 눈치챌 때도 되지 않았냐?"
내 궁색하고도 당당한 변명에 아내는 짜증 난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하, 진짜. 내가 너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오래 못 산다. 어쩌다가 이런 바보랑 결혼한 거지?"
"여보, 잊지 마. 여보가 선택해서 한 결혼이야. 남은 인생을 이 바보랑 함께 보내기로 선택한 건 여보라고. 그러니까 여보가 더 바보야."
"그땐 네가 이렇게까지 바보인지 몰랐지. 이 정도로 바보인 줄 알았으면 절대 결혼 안 했을 거야."
"그렇긴 하지만, 너 나 안 만났으면 평생 혼자 살았을걸? 아마 평행우주 어딘가에는 저명한 교수로서 큰 집에 강아지 네 마리랑 살고 있는 여보가 있겠지만 분명 많이 외로울 거야. 그리고 우리는 어느 유명 관광지에서 서로 누군지도 모른 채 스쳐 지나가겠지. 아, 물론 나는 주식이 대박 나서 엄청 부자일 테니까 옆에 어떤 이쁜 여자가 있을 거고."
내가 평소처럼 평행우주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하자, 아내는 "또 소설 쓴다"며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미간의 주름은 더 이상 뚜렷하지 않았다.
"그럼 적어도 강아지들이랑 스트레스는 안 받으면서 평화롭게 오래오래 살았겠네!"
생각해 보면 이런 의사소통 실패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일기에도 분기마다 한 번은 꼬박꼬박 기록하는 거 같다. 가장 대표적인 일은 2년 전에 마트의 야채 코너에서 일어났다.
당시, 나는 분명히 "내가 바게트 가지러 갈 테니까, 버섯 앞에서 만나자"라고 했다. 그런데 아내는 그걸 "바게트 가지러 가니까 버섯을 가지고 계산대에서 만나자"라고 들었다.
아내는 계산대에서 바게트를 든 채 야채 코너 쪽으로 해맑게 걸어가는 나를 발견하고는 몹시 어이가 없었다고 했다. '도대체 저 인간이 어딜 가는 거지?' 하며 황당하게 쳐다봤다는 것이다. 결국 아내가 전화를 걸어 계산대로 안 오고 뭐 하냐고 화를 내면서 그날의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물론 나는 굉장히 억울했다. 그때도 내 블랙박스에는 "버섯 앞에서 만나자"가 선명하게 녹음되어 있었다.
그날의 억울함이 떠올라서 였을까? 보통 이럴 때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지만, 오늘만큼은 물러설 수 없어서 나는 짐짓 논리적인 태도로 항변했다.
"여보, 가만히 생각해 봐.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우리는 항상 내가 실수했다는 전제하에 대화를 해. 근데 대부분 의사소통 실패는 보통 세 가지 이유로 생겨. 첫째, 내가 말을 이상하게 했거나. 둘째, 네가 내 말을 잘못 이해했거나. 셋째, 그냥 우리 둘 다 뭔가를 착각했거나. 일일이 녹음하지 않는 이상, 누가 맞는지는 알 길이 없다니까!"
나의 명쾌한 논리에 아내가 "아, 인정"이라며 서툰 한국어로 대답했다.
"그렇지만 평소에 네 행동거지를 보면 분명히 내가 맞았을 거야.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뭔가 제대로 좀 이해를 못 했다 싶으면 확실하게 그냥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을 해."
내 결백을 증명해 줄 객관적인 목격자가 절실했다.
그때, 내가 끌고 가던 유모차로 시선이 향했다. 아침 식사 시간에 보조 의자에 앉아 우리의 모든 대화를 빠짐없이 듣고 있던 아들. 똘똘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아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아들아, 빨리 커서 아빠의 증인이 되어주렴...'
그렇게 이 글을 다 쓰고 나서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글을 읽어 내려가는 아내의 표정을 살피며 '이제 슬슬 웃을 타이밍이 되었는데'하며 검지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예상대로 아내는 곧 큰소리를 내며 웃었고, 어딘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재밌다. 근데 말이야. 가만 생각하니까 여기에 네가 마치 잠수할 것처럼 한숨 크게 들이쉬고 입술 꽉 깨무는 장면이 빠졌잖아. 지금처럼 이렇게 내 미간 주름만 묘사해 놓으면 나만 예민하고 화내는 사람 같잖아!"
"아, 그건... 네가 실제로 예민한 데다 화를 잘 내기도 하고... 내가 그 부분을 글로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몰라서 일부러 뺀 거야..."
아내가 혀를 쯧쯧 차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너, 버섯이랑 바게트 반대로 썼어."
"아, 또 그건 무슨 소리야? 내가 똑똑히 기억하는데 진짜... 기다려봐!"
나는 호기롭게 서재로 가서 노트북으로 2년 전 일기를 뒤져 보았다. 거기에는 내가 "버섯 가지러 갈 테니 바게트 들고 계산대에서 만나자"라 했고, 아내는 그걸 "바게트 들고 버섯 앞으로 와"라고 들었다고 명확히 적혀 있었다.
아내가 맞았다.
내 블랙박스는 고장 난 게 분명했다. 더 무서운 사실은,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바게트를 들고 버섯 코너로 걸어가는 장면 그리고 그런 나를 계산대에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아내의 모습까지 아주 생생하게 떠올렸다는 거다.
어쩌면 유일한 목격자는 검찰 측 증인이 될 거 같다는 생각에 깊은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