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30대 가장의 짝사랑 이야기
나는 볼빨간사춘기의 열렬한 팬이다. 개인적으로 ‘좋다고 말해’와 ‘나만, 봄’은 우주 최고의 명곡이라 생각하고 있다.
볼빨간사춘기를 접한 건 순전히 동생 덕분이었다. 휴가 겸 잠시 귀국했을 때, 마중 나온 동생의 플레이리스트는 볼빨간사춘기의 노래로 가득했다.
"마, 니는 나이가 내일모레 서른인데 뭐, 이리 간지러운 노래를 듣노?"
"아, 뭐라카노! 야들이 노래가 얼마나 좋은데... 뭣도 모르면서 그란다."
그렇게 뭣도 모를 때는 타박했지만, 그해 여름... 안지영의 목소리는 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 나온 ‘나만, 봄’은 매년 꽃이 필 무렵에 꼭 듣는 노래가 되었다.
그 달콤한 목소리가 내 무의식까지 닿았던 걸까? 작년 봄, 아주 기묘한 꿈을 꿨다.
눈을 뜨자 내 앞에는 필기로 가득한 녹색 칠판이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분필 가루 냄새, 그리고 열린 창문으로 왈칵 밀려드는 달큰한 봄바람... 콧등 위로는 차가운 뿔테 안경이 느껴졌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어깨너머로 낯선 긴 생머리가 찰랑거렸다. '이게 무슨 일인 거지?'라며 당황스러워야 해야 마땅한 상황일 텐데 내 손은 아무렇지 않게 노트 위에 필기를 이어갔다.
곧 수업 마침 종이 울리자,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남학생이 의자를 드르륵 끌며 일어났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교실 뒷문을 나가는 그 아이의 뒷모습... 손은 교과서를 정리하고 있었지만, 내 눈은 나도 모르게 그 애의 동선을 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녀석은 내 시선이 닿는 걸 모르는지 유유히 복도로 빠져나갔다.
그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순정만화였으면 내 뒤에 배경으로 있었을 거 같은 친구들이 내 책상 주위로 몰려와 입을 모아 성토하기 시작했다.
"야, 쟤 왜 이렇게 싸가지 없어? 아까도 선생님한테 대드는 거 봤어?"
"완전 재수 없어. 진짜."
친구들은 그 녀석이 교실을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뒷담화를 시작했지만,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니들이 뭘 알아. 걔가 얼마나 따뜻한 앤데...’
여고생으로 살기 시작한 지 10분도 안 된 거 같은데, 이상하게 그 아이에 대한 내밀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하굣길, 인적 드문 학교 뒤편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던 그 애의 뒷모습...
평소의 그 거친 말투와는 전혀 다른 다정한 목소리...
"많이 배고팠냐? 천천히 좀 먹어, 임마."
녀석은 꼬질꼬질한 길고양이에게 참치 캔을 따주고 있었다. 나른한 봄 햇살 아래에서 투박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 모습을 본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뻔하디 뻔한 순정만화 클리셰 같은 장면.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마치 내가 직접 겪은 일인 양,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래서일까? 내 눈엔 그 애의 퉁명스러운 행동 하나하나가 귀여운 투정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친구들과의 이야기를 끝내고 집으로 걷던 중, 벚꽃이 만개한 거리의 모퉁이에서 누군가와 ‘탁!’ 하고 부딪혔다. 고개를 들어보니 바로 그 녀석이었다.
"야,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 에휴..."
역시나 쏘아붙이는 말투... 하지만 머리 위로 연분홍빛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나를 무심하게 잡아 일으켜 주는 그 손길은 고양이를 쓰다듬던 그때처럼 섬세했다.
'섬세...?'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귀 끝으로 확 열기가 몰리는 게 느껴졌다. 그대로 입술을 꾹 깨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집을 향해 내달렸다. 가슴속에서 북소리 같은 파열음이 울려 댔다.
다시 또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내 방 책상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데 글자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창가 분단에 앉아 있던 그 아이의 옆모습으로 가득했다.
‘도대체 넌 뭐야? 왜 갑자기 이렇게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거냐고?!’
두 손으로 볼을 감싸자 손바닥 위로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방 안은 요란한 내 심장 소리로 가득찼다.
"아, 몰라! 진짜!"
애꿎은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리고서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책상 위에 얼굴을 파묻고 ‘쿵!’ 엎드려 버렸다. 그렇게 책상에 이마를 대고 깊은 잠으로 빠져드나 싶던 그 순간.
번쩍!
눈이 떠졌다. 꿈이었다.
내 심장은 여전히 짝사랑에 빠진 십 대 소녀처럼 요동치고 있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아내가 옆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익숙한 공기...
익숙한 침대…
그리고 익숙한 숨소리...
정신이 들기 시작하면서 안도감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다시 잠들면 이 생생한 감각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나는 다급히 아내를 흔들었다. 한밤중에 날벼락처럼 남편의 '여고생 빙의 로맨스'를 듣게 된 아내는, 처음엔 잠이 덜 깬 눈으로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여보, 이게 그냥 웃고 넘길 일이 아니야. 평행우주론으로 접근해 보면, 다른 차원 어딘가엔 진짜 짝사랑에 밤잠 설치는 여고생인 내가 살고 있을 확률이 존재한다고.” 나름대로 양자역학까지 들먹이며 열변을 토했다.
"그럼, 나는? 그 평행우주에서 나는 뭔데?"
"어... 내가 여고생이니까 너는 남중생쯤 되려나? 아니다 역전이면 대학생이어야 되나? 뭐 세부적인 건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인연이라면 한 10년쯤 뒤에 만날 거야."
아내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하면서도 딱히 부정의 말을 얹지는 않았다.
출근길, 다시 ‘나만, 봄’을 흥얼거리며 생각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다른 우주의 나로 살아보고 싶다고...
P.S. 이 글은 볼빨간사춘기의 ‘좋다고 말해’와 '나만, 봄'을 들으면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