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변방에서 올리는 기도
모두가 마스크를 끼고 다니던 어느 날, 나는 영국의 한 작은 마을에 정착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다 보니 가지고 있는 물건은 들고 온 여행 가방 두 개가 다였다. 인터넷에서 집에 채워 넣을 조립 가구를 이것저것 골라 이사하는 날에 딱 맞춰 배송을 예약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만들기 시간만 되면 제대로 완성을 못해서 마칠 즈음에는 울상이 되던 나였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많은 가구들을 덜컥 주문했던 건지 다시 생각해도 미스터리다.
이사 당일, 예약해 둔 가구들이 들이닥치자 텅 빈 집이 순식간에 자재 창고로 돌변했다. 아침부터 배송 직원들과 끙끙대며 박스들을 2층으로 날랐다 보니 벌써부터 근육통의 기운이 느껴졌지만 쉴 틈 따위는 없었다. 청소기가 도착하려면 한 이틀은 기다려야 했다. 이대로면 먼지 구덩이 속에서 매트리스만 덜렁 깔고 자야 했기에, 나는 곧바로 공구를 집어 들고 침대 조립에 돌입했다. 곧 영국으로 올 아내를 생각하며 야심 차게 커다란 퀸사이즈 침대를 주문했었다. 계획은 그럴싸했지만 시공자가 나라는 치명적인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목재와 나사들을 바닥에 깔아 둔 채 설명서를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영상을 재생했다 멈췄다를 반복하며 더듬더듬 따라 하기 시작했다. 뚝딱뚝딱거리는 소리와 함께 헤드와 레그가 완성되자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곧 지지대 연결이라는 난관에 봉착했다.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누군가 옆에서 잡아주기만 해도 수월할 텐데, 여기까지인가...' 울상이 되려던 찰나, 완성된 침대에 누워 편안해할 아내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 상상은 묘한 용기를 불러일으켰고, 나는 다시 공구를 움켜쥐었다.
널브러진 목재 덩어리들이 비로소 침대의 형상을 갖췄을 땐, 이미 창밖이 어둑해진 뒤였다. 그날, 나는 30년 인생에서 처음으로 조립 가구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는 달콤한 승리감에 취한 채 내가 건국한 퀸사이즈 제국 한복판에 대자로 뻗었다. 피곤했던 탓인지 제대로 된 즉위식을 치르지 못하고 바로 잠들어버렸다.
계획과 달리, 침대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만의 것이었다. 아내의 비자 문제에 가족사까지 겹친 탓이었다. 매일 밤, 광활한 매트리스 위에 나는 혼자였다. 왼쪽으로 그리고 오른쪽으로 뒤척이면서 있지도 않은 내 자리를 찾아 헤맸다. 베개 산맥과 이불 숲이 수차례 옷을 갈아입고 난 뒤에야, 아내는 영국에 도착했다. 왕비의 입성을 축하하듯 대지 위에 새로운 베개 산이 솟아올랐다. 바야흐로 태평성대의 시작이었다. 나와 아내의 자애로운 통치 아래, 제국의 방방곡곡에서 매일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탄생했다. 아들은 황태자답게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 침대에 합류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당연하다는 듯이 침대를 강탈했다. 녀석의 영토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내의 출산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회사 동료에게 거의 새 아기 침대를 받았었다. 나는 퀸사이즈 제국을 건설하던 그 비장함으로 요람의 성을 건설해 두었다. 하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아들은 그 요람의 성에 눕기만 하면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당황한 우리 부부는 황급히 성문을 열 수밖에 없었고, 아들은 아내와 나 사이에 깃발을 꽂고 나서야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그렇게 요람의 성은 마른빨래들의 쉼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들의 정복 활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작년 여름 고향을 방문했을 때도 까탈스러운 녀석을 위해 어머니는 기꺼이 자신의 제국을 양보하고 딱딱한 바닥으로 망명하기를 자처했다. 바닥에 누운 어머니를 보며 아버지는 혀를 차셨지만, 어머니는 그저 웃기만 하셨다. 이런 아들의 명성을 익히 들은 처형 내외는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성문을 활짝 열어두고는 바닥으로 피신해 있었다. 단 한 번의 전쟁 없이 모두를 굴복시키는 아들을, 한 사가는 평화로운 정복왕이라 기록했다.
그러나 그 명성과 달리 정복왕의 치세는 결코 자비롭지 않다. 그는 매일 밤 천지를 뒤흔드는 쩌렁쩌렁한 소리로 조공을 요구한다. 아내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고는 품에 안고 달래기 바쁘다. 흡족한 얼굴로 잠든 왕을 볼 때면 우리 부부는 평화가 왔다며 양팔을 번쩍 들고는 소리 없는 만세를 외친다. 애석하게도 조공으로 얻은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는 법... 정비를 마친 아들은 곧 쉴 새 없이 팔다리를 휘두르며 영토 확장을 꾀하고 그 기세에 놀란 우리 부부는 슬금슬금 후퇴하고 만다.
나와 아내는 오늘도 내가 건국한 이 퀸사이즈 제국의 양 변방 끝에 매달려있다. 그리고 아들은 제국의 정중앙 가장 비옥한 영토에 대자로 누워 발꿈치로 매트리스를 쿵쿵 두드리며 승전고를 울린다. 아직 왕위를 계승한 적도 없건만 이미 하늘로 뻗친 머리라는 왕관을 쓰고 잠든 정복왕을 보며, 우리는 간절히 기도한다.
“위대한 정복자시여, 오늘은 부디 무사히 자게 해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