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 프로젝트_29. 느긋 by희진

by 김희진

우리가 개인주의자의 공동체를 만들면 어떨까. 서로를 돌보지만 침범하지만 않는 느긋한 관계 혹은 연대 말이야.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일단 같은 아파트의 이웃이거나 도보로 이동 가능한 한 동네에 산다면 좋겠지. 일주일에 한 번 즘 정해진 시간에 함께 식사를 하거나, 독서모임 같은 걸 같이해도 좋을 거야. 정기적으로 만나 열의 넘치는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생존도 확인하고, 대신 서로의 집은 비공개의 영역으로 남겨두었으면 좋겠어. 모든 만남의 비용은 더치페이, 사적인 영역은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절대 꼬치꼬치 묻지 않도록 해.

물론 말만 쉬운 일이겠지만 말이야.

낭만적으로 대강 품은 희망이지만, 일단 꿈꿔 볼 순 있잖아. 생각이라도 해두면 그래도 포기하는 것보다 한 발 가까이 가는 거잖아.

분명 어려운 일이긴 할 거야. 그건 예상보다 천배, 만배 그렇겠지. 일단 나부터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거리 유지에 실패가 잦은 편이니까.

스물여섯 때보다는 조금은 성숙한 서른여섯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인간관계의 기승전결은 이상하게 반복되더라. 역사가 그렇듯.

다만 한 가지 나아진 점은 감정의 낙폭이 좀 낮아졌다고 할까. 내색을 좀 덜하게 되었다고 할까. 아니, 그렇지도 않은가. 상처 받는 지점은 늘 비슷하고 상처 주는 이유는 잘 고쳐지지 않고, 기대하는 마음은 나도 모르게 또 생겨나고, 이번에는 정말 잘해보려고 했는데 또다시 망쳐버리고...

사람에게 맥락 없이 빠져들지 않으면 인정사정없이 무관심해져. 적당하고 이성적인 관계가 없어. 애초에 그런 게 안 되는 인간인가 봐.

속이 좁기는 또 어찌나 좁은지 말 한 마디에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혼자 후비고 뒤집고 별짓을 다해.

무조건 적으로 마음을 주더라도 기뻤던 관계가 길어지면 혼자 지쳐 버리지. 혼자 시작한 관계는 혼자 화나고 삐지고 나뒹굴다가 혼자 정리해.

인간관계는 점점 좁아지는데 그렇다고 깊어진다거나 질이 높아지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상처 받기 싫어 선긋기의 여왕이 되었다가, 상처 받아도 좋다고 폭주하며 무턱대고 다가가다가, 다시 상처 받아 선을 그었다가 그러다간 혼자만 남을 거 같아 다가갔다가 그 뫼비우스의 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평생 반복되는 건 다이어트와 요요뿐이 아닌가 봐.

이런 내가 느긋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까.

너를 존중하지만 방해하진 않는 그런 멋진 관계를 만들고 싶은데...

나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