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한 책은 하루 만에 도착하였고 책을 받자마자 단숨에 읽어버렸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이기에 한 장 한 장 아껴 읽으려 애를 썼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잠시 잠깐 놓을 새도 없이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다.
가슴이 먹먹해질 때는 잠시 숨을 고르며 가만히 그 문장을 되뇌며 쉼을 주었다.
「창작과 비평」, 「자음과 모음」을 읽지 않았기에 책 내용 중 발표된 작품이 있는지는 책을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네 편 속 인물들의 이야기는 각각 떨어진 이야기들이 아니기에 작품 네 편을 한 번에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특히 네 편 중 「무명」 속 이순일을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하느라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독자에게 지나친 억지 연민을 끌어내지 않는 작가의 작법이 참 좋다.
책 속의 주인공들에게 지나친 감정이입을 하지 않도록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 주는 문장들이 참 좋다.
그렇다고 냉소적이거나 날이 선 문장들도 아니다.
한 문장 한 문장 참 따뜻한데 가슴이 에인다.
그 안에는 내가 있기 때문이다.
드러내면 버림받을까 두렵지만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이해해줬으면 하는 나의 모습.
그런 여리고 약하고, 남들은 어리석게 보거나 비난할 지도 모를 모습을 작가는 절대 내버려 두거나 모른 척하지 않고 감싸 안는다.
그래서. 나는. 황정은 작가가 참 좋다.
그러니까 순자야
내가 어머니를 닮았다는 걸 나 그때 비로소
[연년세세 - 무명, p137]
이 문장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서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몇 번이고 되뇌고 또 되뇌었다.
독특하고, 아름답고, 불완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물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문장.
그리고 황정은 작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다른 작가들은 흉내 낼 수 없는, 그런 문장.
<작가의 말>에서 황정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가족 이야기로 읽을까?
얽히고설킨 가족사로 인한 소용돌이 같은 이야기라기보다는 각자의 기질에 따라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처한 이 나라의 상황 속에서, 다른 삶의 방향과 가치를 향해, 치열하게, 자신의 몫을 살아내는 이들의 인생 이야기로 읽었다. 물론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성장하고 살아낸 인물들은 서로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떼어낼 수 없다.
그리고 이 나라가 겪은 일들이 세대를 걸쳐 개인의 인생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쳤는지도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 삶을, 보통의 삶으로, 애써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담담히 들려준다.
그 삶을 들여다보며 가슴이 에인다면 그들의 삶이 너무 고단해서, 마음이 아파서가 아니라 나와 같기 때문일 것이다.
그 치열한 삶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남으려 애쓰는 이들의, 대를 거치며 이어지는 인생 이야기이자 엄마의 이야기, 딸의 이야기, 자매의 이야기.
소설 속 인물들의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나다.
한세진의 인생, 한영진의 인생, 이순일의 인생, 순자의 인생, 한만수의 인생, 노먼의 인생 그리고 윤부경의 인생.
그리고 누구의 삶이 더 혹독한지 겨루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따뜻하게 보듬어주는 황정은 작가의 시선에서 나 또한 위로받는다.
이순일이 매년 낫으로 길을 내며 거기로 올라가는 이유를 한세진은 이해했다. 엄마에게는 거기가 친정일 것이다. 그 묘가.
할아버지.
[연년세세 - 파묘, p17]
그래도 무언가를 느끼기는 했을 것이다. 어떤 감정을. 한영진은 최근에 그걸 생각할 때가 있었고 그러면 얼굴이 빨개지곤 했다. 어린 동생에게 잘못을 했다고 느꼈다. 손써볼 수 없는 먼 과거에 그 동생을 두고 온 것 같았다. 이제 어른이 된 한세진에게 사과한다고 해도 그 시절 그 아이에겐 닿을 수가 없을 것 같았고.
[연년세세 - 하고 싶은 말, p63]
한영진의 모성은, 그걸 부르는 더 적절한 이름이 필요하다고 언젠가 한영진은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타고난 것이 아니고 그 간격과 관계에서 학습되고 형성되었다. 그건 만들어졌다. (...) 이순일의 노동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연년세세 - 하고 싶은 말, p75]
왜 나를 당신의 밥상 앞에 붙들어두었는가. 한영진은 그러나 그걸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 질문을 들은 이순일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순간을 대면할 용기가 없었다.
[연년세세 - 하고 싶은 말, p83]
그게 무엇이든 이순일은 가책을 느꼈다. 그게 무엇이든, 자기 손으로 건넨 것이 그 아이들의 손으로 넘어가 쪼개졌고 그 파편을 쥐고 있느라 아이들이 피를 흘리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연년세세 - 무명, p109]
무엇이 사라졌는지 모르고 지냈다. 잃은 것을 잊은 것으로 해두었다. 그러면 그건 거기 있었다.
[연년세세 - 무명, p112]
잘 살기.
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하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잘 모르면서 내가 그 꿈을 꾸었다. 잘 모르면서.
[연년세세 - 무명, p138]
안나는 안나의 삶을 살았어, 여기서.
[연년세세 - 다가오는 것들, p178]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연년세세 - 다가오는 것들, p182]
* 책을 다 읽고서 문득 황정은 작가가 만난 '순자씨'는 누구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와 혈연으로 관계 맺어진 누군가의 이야기는 아닐까라는 혼자만의 상상을 하며...
**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디디의 우산」 출간 당시처럼 독자들과 만나는 자리가 마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 하아... 황정은 작가만큼 좋은 문장을 추려내기가 힘든 작가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가슴에 박히는 문장들이 너무나 많다. 입력했다가 삭제한 문장들도 많지만 혹여 스포일러가 될까 싶어 쓰지 못한 문장들도 많다.
오늘 또 책 속 인물들의 인생을 떠올리느라 푹 자긴 그른 듯싶다.
그렇지만 그 불면의 시간 동안 나의 내면이 충만해지기에 기꺼운 마음으로 오늘 밤을 맞이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