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고민
어느 의대생의 사연
'솔직히 의대 오기 싫었다. 고1까지 난 경제학, 정치학, 역사학이 좋았고 수학이랑 과학은 싫어했고 또 못했다.
그런데 부모님은 문과 가면 굶어 죽는다고 강제로 이과로 보냈다. 수학, 과학 못하는데 이과 갔다?ㅋㅋ 당연히 재수했다. 재수할 당시에도 9평까지 내 성적은 중경외시 공대 정도 갈 점수였다. 그래서 기대도 안 하고 수능 치러 갔는데 하필 수능장에서 살면서 받은 점수 중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고 수도권 의대에 왔다.
의대 와서 예과 1,2는 하고 싶은 공부 하며 재밌게 다녔던 거 같다. 그리고 본과 1,2는 힘들고 재미도 없었고 하기도 싫었지만 신기하게 성적은 아주 나쁘진 않았다. 물론 아주 좋지도 않지만. 근데 지금 가장 큰 문제는 하고 싶은 과가 없다는 것이다.
과는 차악을 고르는 것이라고들 얘기하지만 차악이고 자시고 의사 하기가 싫다. 여전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공부는 경제학, 정치학, 역사학이며 그쪽 분야로 나가서 일을 하고 싶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의사면허까지만 따고 아예 저쪽으로 방향을 틀어보는 게 좋을까 아니면 그래도 트레이닝은 억지로라도 받아야 하는 걸까? 아직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한번 사는 인생이니 내 하고 싶은걸 하는 게 답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내가 너무 현실을 외면하고 내 꿈만 좇으려는 철부지 어린애 같기도 해서 고민된다.'
답변
C/C : '하고 싶은 과가 없다.'
- 본과 3에서는 WNL(within normal limit)
P/I : 고1 때 문과 성향, 수학과 과학이 싫었고 못했음.
부모님이 강제로 이과 보냄.
의사 하기가 싫고 경제, 정치, 역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음.
Q : '의사면허까지만 따고 아예 저쪽으로 방향을 틀어보는 게 좋을까 아니면 그래도 트레이닝은 억지로라도 받아야 하는 걸까?'
A : 의사면허 취득 후 생각해보고 하고 싶은 대로 결정하면 됩니다.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아 댓글을 답니다.(C/C와 P/I가 거의 동일합니다. 유일한 차이점이 나는 의사가 하고 싶어서 의대를 갔습니다.)
일단 본과 3 시점에서 보는 관점이 졸업 후에는 달라지고 레지던트 수련 시나 수련 후 전문의가 되고 나면 또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본과 1 때 해부학은 암기과목이라 여겨지고 억지로 시험을 치기 위해 공부한 재미없는 학문이었지만 레지던트 때 수술을 위해 공부한 해부학은 단순한 암기과목이 아니며 재미있기까지 한 학문이었습니다.
의사가 반드시 환자를 보는 임상만 하란 법은 없습니다. 다양한 학문(인문학도 포함)과 융합되어 가치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융합학부에서 가르치고 있는 인공지능도 의료 인공지능의 경우 의사 거기다 임상경험까지 있으면 대단히 유리합니다. 공학자가 의학을 배우는 것이 의학자가 공학을 배우는 것보다 더 어렵고 시간이 더 걸릴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학과 학부와 대학원생들에게 의료 인공지능을 강의할 때 학생들이 내게 공학적 지식보다는 의료 domain 지식을 더 필요로 합니다. 의사가 되고 거기에 트레이닝을 받고 임상경험을 쌓으면 의료와 융합 분야에서 큰 도움이 됩니다.
이과 성향이 아니고 의사가 하기 싫은데 (나는 의사가 하기 싫지는 않았습니다. 좋아서 하고 싶어서 했습니다.) 왜 수능을 갑자기 잘 봐서 의대를 오게 되었을까 한탄하지 말고 본인이 관심 있고 하고 싶은 분야와 융합된 학문을 할 좋은 기회라 여기기 바랍니다. 의사는 기본적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직업인데 꼭 환자를 직접 봐야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예방의학도 환자를 직접 보지 않아도 많은 수의 환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인문학과 사회학에 관심이 많으면 의료인문학 또는 인문사회의학을 전공하고 연구해도 됩니다. 역사에 관심이 많으면 의사학을 해도 됩니다. 경제학에 관심이 많으면 보건경제학을 해도 됩니다. 정치에 관심이 있으면 정치를 해서 지역사회나 나라를 치료하는 큰 의사가 되어도 좋습니다. (내가 대한정치학회 최초로 비전공자 정회원이 되고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현실정치를 하려는 이유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김종서의 노래 제목처럼 '지금은 알 수 없어'입니다. 나중에 세월이 흐르고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더 많은 걸 깨닫고 나면 왜 본인이 의대를 가게 되고 의사가 되었는지 알게 되고 그것이 큰 행운이고 기회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 미래를 너무 미리 앞당겨 생각해 단정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마지막에 '현실을 외면하고 꿈만 좇으려는 철부지 어린애 같아서 고민된다.'라고 했는데 이상(理想;ideal)은 현실(現實;reality)과 반대되는 개념이지만, 현실에서 절대 이룰 수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적으로 이상은 실현 가능한 상대적 이상과 도달 불가능한 절대적 이상으로 나뉩니다. 절대적 이상을 목표로 해야 상대적 이상이 실현됩니다. 반면 현실에만 안주하면 발전이 없습니다. 이상을 현실로 만드는 건 의미 있고 흥미로운 일이고 그 원동력은 꿈을 꾸는 것입니다. 꿈이 있는 한 늙지 않습니다.
니체는 인간 정신발달의 3단계로 '낙타, 사자, 어린아이.'를 언급했습니다. 어린아이는 삶의 예술가입니다. 삶을 놀이로 만들고 놀이의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어린아이의 정신, 니체는 어린아이의 정신 형태를 그가 추구했던 초인(Übermensch)과 가장 가까운 유형이라고 보았습니다. 니체가 한 말로 마무리하겠습니다. 'amor fati' 의대에 오고 의사가 될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기 바랍니다.
가능성과 희망으로 가득한 앞날을 응원하고 행운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