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좋지만, 좋은 일? 안타깝지만, 잘한 일?
우리는 때때로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미리 정해놓고 살아간다.
그 일들에 감정까지 정해놓는다.
사회적으로 규정해 놓은 그 것들로 인해 나 역시도 그리 정하고 살았다.
인생 사건의 수위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람들은 안좋은 일을 겪게 되면 힘들고 불행하다고 여기게 된다.
나의 인생에도 그런 사건이 있었다.
처음 코치 자격을 획득하고, 여러 코칭과정에 등록해서 코칭 수련을 하던 때였다.
그룹코칭에서 서로 질문을 주고 받는 시간이었는데, 참여자 한 분이 리더 코치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했다.
'남편은 뭐 하시는 분이세요?'
코치님은 '이혼했다'고 대답했다.
참여한 사람들이 좀 민망해했고, 나도 속으로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는 개인적인 질문은 피해야지 않나?'하고 생각했다.
나도 그 때, 이혼 상태였다.
질문을 던진 참여자가 '죄송합니다.'라고 하니, 코치는 괜찮다고 했다.
이미 지난 일이고, 10년도 더 된 일이라면서...
'이혼이 우리에게 더 나은 선택이었어요!'
오히려 이혼 한 후, 개인적으로 만나보진 않았지만, 서로 잘 되기를 응원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 때, 그 코치님이 참으로 멋져 보였다.
나에게 이혼은 불행한 일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결혼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당시에 더 불행했고, 내가 이혼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합리화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나는 그 멍에에 묶여 있었다.
'이혼이 불행한 일이냐?'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 일을 겪고 나서 더 잘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모든 사건은 반증의 기회를 겪는다'
이렇게 나의 뇌를 각성시켰다.
그런데,
매스컴에서 아무리 연애인, 유명인들의 이혼 사건을 다루고, 사회적으로 이혼이 수용되는 듯 해 보이지만, 이혼을 감당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 사전에 없었던 '이혼'이라는 글자가 생겼기 때문에, 그 걸 스스로 안아줄 수 있는 큰 마음이 필요했다.
'이혼'은 나의 자존감을 한방에 무너뜨렸다.
이혼이라고 하는 사실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혼의 상처를 덮어 줄 더 큰 무언가가 필요했다.
내가 당당하게 설 수 있을 만한 '내 일'을 갖는 것이었고, 아이들의 '양육'을 아주 잘 해내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갔다.
'스트레스 파워'라는 책도 출간했고, mbc, sbs 방송에도 나가게 되고, 아이들에게도 '좋은 엄마' 같아 보였다.
아마도, 내 삶의 지금, 이혼 한번이었다면, 나는 자존감을 회복하고, 당당하게 성공한 여자로 아주 잘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인생은 나에게 훈장만을 남겨주지 않았고, 다시 상흔이 주어졌다. 나의 인생이 이제 꽃길이 될 줄 알았는데, 자갈길이 될 줄은 몰랐다.
나의 마음을 송두리째 가스라이팅 당할 정도로 이혼의 상실을 회복하고 싶은 남성이 나타났고, 그에게 청혼을 받았을 때, 나는 그 사람의 사랑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성공적인 재혼이 되기를 너무 갈망한 탓인지, 악마의 노략이었는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믿었던 사람에게 발등 찍히는 내 상처보다, 아이들에게 엄마로서 절대 해서는 안되는 상처를 두번이나 주게 되는 부족한 모자란 형편없는 엄마가 되어버렸다.
얼마나 사람 보는 눈이 없었으면, 재혼한지 1년도 되지 않아 20살이나 차이나는 여자랑 살기위해 나에게 이혼을 내밀 수 있는 그런 남자와 백년회로할거라고 생각했냐 말이다.
첫번째 이혼할 때, 그렇게 힘들었는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두번째 이혼은 정말 매일 매일 죽고 싶었다. 아이들을 더 불행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다시 살아내기로 맘 먹어야 했다.
사회적으로 100% 용인되지 않은 일에 좋은 평가를 받을려고 용쓰기보다, 내 아이들에게 기회비용이 따르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아이들의 엄마로 그대로 머물렀다.
그리고, 좋은 엄마 되기에 이미 실격일지 모르나, 그래도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아마도 두번 째 이혼을 겪지 않았으면, 나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며, 심리학에 심취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상담학 박사학위도 좋은 엄마 되는 기회도 영영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