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이 아니길 바라며...
누구를 위한 삶일까?
엄마가 아무리 자식을 위한다 해도 그 진실, 아니, 무의식 속에는 엄마 자신을 위한 것이다.
아이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나는 이미 나쁜 엄마인데도 좋은 엄마로 보일려고 애썼다.
큰 아이는 아빠랑 살면 안되느냐고 물었다.
이혼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혼 후 3년이 훨씬 지났을 때까지도 큰 아이는 엄마 아빠가 같이 한집에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엄마 아빠의 재결합을 마음 속 깊이 소망했다. 이미 아빠는 새엄마라고 부르는 다른 여자랑 살고 있었고, 그 여자와의 사이에서 딸을 하나 낳았음에도 큰 아이는 자기 친엄마와 친아빠가 같이 살기를 바랬다.
'엄마랑 아빠가 같이 살면 안돼?' 하고 물었을 때, '응, 미안해! 엄마랑 아빠는 같이 살 수 없어. 엄마는 열심히 일하고 살아있는 사람처럼 활기차게 살기를 원해. 너희들은 아무 잘못이 없어! 엄마랑 아빠가 헤어졌어도 너희 진짜 엄마는 엄마고, 아빠도 그대로 존재하는거야. 엄마랑 아빠가 한 집에 살지 않고, 따로 살아도 엄마 아빠가 바뀌는 건 아니야. 엄마가 너를 낳았지. 다른 사람이 낳은 게 아니란다! 엄마는 여전히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를 사랑하더라도 아빠랑 살 수는 없단다. 미안해!'
알아 듣는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내 의무였다.
이 선택은 자녀를 위한 것이 아닌, 나를 위한 것이었을까?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고 합리화 한다.
내 입장에서 육아에도 경제에도 도움 안되는 아빠는 없는 편이 나았지만, 아이들은 그런 아빠라도 있는 편이 나았던 것이다.
나는 아이를 포기하고 양육비를 내가 주기로 하고 합의이혼을 했다.
이 부분에 대해,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 이혼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내가 유책배우자이기 때문에 재산 일푼 없이 헤어졌을 것이라고 단정짓기도 했다. 자식들을 놔두고 나간 아주 모진 엄마이고 나쁜 엄마가 되었다. '어떻게라도 살아야지, 왜 나가냐'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렇게 지인들은 빈손으로 이혼하고 나온 것에 대해 내가 유책배우자쯤 되는 걸로 판단했다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분명히 무슨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 미안했다고 했다.
결혼 9년 중 7년 가량 생활비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첫 2년 동안에 180만원 받은 돈에서 80만원 저축하고, 100만원으로 생활했는데, 그 돈이 없었더라면 그 마저도 생활이 어려웠을 것이다. 이 후에는 내 통장에 있던 결혼 지참금과 그동안 저축했던 예금을 깨서 살림을 살았다. 결혼 9년 동안 속 옷 하나 옷 한벌 사입지 않았다. 5년 동안 서울 친정에 가는 비용도 아까워서 다녀가질 못했다.
'남편이 생활 능력이 없으면 아내가 벌면 되겠지.'
결혼 7년차, 경제활동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판단에 경력단절에서 벗어나려고 애쎴다. 애들 아빠는 육아도 제대로 돕지 못했고, 그의 무능은 오히려 더 커져갔다. 내가 죽을 때까지 이 사람을 책임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게 가장 큰 이혼 사유였다.
그런데,
결혼 8년차, 그가 내게 이혼하자고 선언한다. 오히려 적반하장이 되었다. 이혼은 내가 해야 할 소리였다.
정말이지, 이혼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내 사전엔 이혼은 없다며, 수락하지 않았었다가, 결국, 인내의 한계를 느끼며, 합의이혼을 하게 되었다.
애들 아빠가 결혼 전에 매입한 아파트에 나의 권리는 1도 없었다. 애들 아빠가 알아보고 내게 통보했다. 나의 공로 같은 것도 없단다. 2012년이었는데, 그 때만 해도 가사노동에 대한 댓가가 그렇게 주어지지 않았었다. 나는 가사와 육아 말고는 가계 경제에 기여한 게 없었기 때문에, 내가 가져갈 게 없다는 것이다.
애들을 데리고 나가서 살아야 하니, 방 한칸 얻을 돈을 마련할 수 있게 아파트를 처분해서 1/2을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아끼고 아껴서 저축했던 예금도 거의 다 써버리고 없는데... 그 예금 말고는 아파트 뿐이라, 결혼 전 매입한 아파트는 재산 분할 청구를 해도 내가 가져갈 게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나도 변호사 사무실에 물었다. 재산분할 소송을 하면 1/3을 내가 가져올 수 있다고 했다. 아파트 시세에서 1/3을 가져온들 광주 아파트 시세가 서울만큼 고액이 아니라서 소송비 빼고 몇 년 동안 에너지 손실을 빼면 바람직한 선택은 아니었다.
나는 싸우기보다, 사회적 경제적으로 내 자리를 튼튼히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애들 아빠는 애들을 키울테니 양육비를 달라는 조건이었다. 염치도 좋았다. 하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엄마가 자기들이 싫어서 나간 줄 알았을 것이다.
경제활동을 시작했지만, 시작단계여서 아이들과 함께 지낼 만한 월세방도 얻을 능력이 되지 못했다. 이혼하고 나와서 1달 넘게 찜질방에서 생활했고, 3년 동안 한달에 2-3회씩 아이들을 만나러 서울-광주를 왕복했고, 드디어 2015년에 아이들을 데리고 올 수 있었다. 그는 이혼 하자 마자 다른 여자랑 살았고, 이듬 해에 자식을 낳았고, 내가 빨리 내 아이들을 데려가 주기만을 원했다.
아이들에게 상처를 준 엄마니까, 그렇지 않은 엄마들보다 더 더 많은 노력을 해야 아이들의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다. 어쩌면 더 상처를 주고 있었는지 모른다. 정답은 없고, 아직 잘 모른다. 다만, 늘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그 힘든 상황들에 대해 나는 아주 긴 시간 갚아야 될 것이다.
딸이 아빠랑 같이 살면 안되냐고 했던 것은 엄마가 같은 집에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아이들은 아빠랑 살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 하더라도 아이들이 원하는대로 해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차선으로 누가 아이들을 양육하는 게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할 수 있을까?
그래도, 엄마랑 사는 것이겠지. 아이들은 부모를 보고 배우는데, 아빠보다는 잘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나는 늘 부족한 엄마였다. 나는 내 형편에 내 입장에 최선을 다하지만,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엄마의 인생이 이해되기 전까지는 나는 엄마 아빠 몫을 다 해낼 수 없기 때문에, 늘 부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