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그래서 그냥 합니다. 아버지처럼

내 마음 들여다 보는 중

by 힐링아지매

2022년 9월 13일 블로그에 게재 글 수정 보완




38년 전 8월 26일, 그해 여름도 무지 더웠다. 남편이 대구지점에서 포항지점으로 발령을 받고 우여곡절 끝에 자리를 잡은 곳이 송도 바다까지 10분 걸음으로 갈 수 있는 포항 송도동이었다. 그 당시 부산 지역 지점에서 지방으로 발령이 난다 해도 부산 근교인 양산이나 김해 정도인데 남편은 너무나 뜬금없이 대구지점으로 발령을 받았고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나면 다시 부산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이번엔 더 먼 포항지점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왜?'라고 의아해하니 '본적이 경북이라서 그렇다네' 남편의 본적이 경북 영일군이라서 그렇게 발령이 났던 것이다

그렇게 2년째 객지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 해 몹시도 무더운 날 새벽에 작은 아들이 우리의 품으로 와서 세상 빛을 봤다.


객지다 보니 몸이 편찮으신 친정어머니 대신 시어머니가 산후조리를 위해 포항으로 오셨고 제대 후 취업준비를 하던 시동생이 홀로 있게 되어 같이 와서 큰 아이와 놀아주기도 하고 산책을 다니기도 하면서 6 식구가 한집에서 지냈다.


첫째는 겨울에 태어났고 그때는 신혼살림을 시작한 시댁이었기에 시어머니도 편하게 산후조리를 해주셨지만 둘째의 산후조리는 더위를 많이 타시는 시어머니에게는 정말 불편하고 힘든 일이셨을 텐데 크게 싫은 내색 없이 다 해 주신 어머니... 감사합니다.

(처음 이 글을 블로그에 올릴 때는 병원에 계셨는데 이제 어머니도 지난 4월에 세상의 소풍을 마치고 우리의 기억 속으로 여행을 가셨다)




​2022년 8월 26일은 둘째 아들의 생일이기도 하지만 음력으로는 친정아버지의 첫 기일이기도 했다. ㅠㅠ​


이대로 하면 90까지는 살겠제~


이 말씀을 입에 달고 사시면서 당신이 90살을 넘기고 돌아가셔야 남은 자식들 고생 덜 시킨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90살이 넘으면 체력도 빠지고 몸도 더 가벼워져서 자식들이 마지막까지 돌보기에 수월해진다고 남은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90살까지는 살아야지 하셨지만 90까지 남은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여든일곱의 마지막 생신 때 온 가족의 축하를 한 몸에 받고 두 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너무나 황망하게 가버린 우리 아버지.


평소 귀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보청기는 극구 사양하시고는 잘 들리지 않으니 큰 소리로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하기도 했는데 그날 아침은 당신 스스로 너무 머리가 아프다고 빨리 병원에 가자고 서두르신다는 동생의 연락을 받고 동생네 근처 병원 응급실로 가서 긴급하게 MRI 촬영을 했고 뇌출혈이나 뇌경색을 의심하신 담당의사 선생님의 염려와 달리 결과는 우리에게 더 큰 충격을 주었다. 뇌혈관 등 기타 모든 부분이 젊은이 못지않게 깨끗한데 평소 아버지가 잘 안 들린다고 하신 왼쪽 귀 위에서 엄청나게 큰 종양이 발견된 것이다. 한 시라도 급히 수술을 하는 것이 아버지의 고통도 줄이고 종양이 더 커지지 않게 하는 방법이라고 하시며 구급차로 더 큰 병원으로 이송을 하게 되었고 기초 검사를 마치고 바로 6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받았고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당시 코로나 19의 경계 수위가 높았고 병원에 계시는 아버지를 볼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었고 보호자도 지정 보호자 1명만 가능했기에 큰 올케가 병실을 지키면서 우리는 유선으로 아버지 상태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 면회를 가서는 하루하루 다른 모습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어떤 날은 평소처럼 대화가 되다가도 어떤 날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혼자만의 세계에 계시기도 했지만 아버지와 더 오래 있을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고 그저 감사하기만 한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그렇게 말하기를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으로 경계가 가장 치열하게 위세를 떨치는 시기에 아무 말씀도 남기지 못하고 병상에서 쓸쓸하게 여든일곱의 세상 여행을 마치셨고 8월 26일 우리는 아버지께 드리는 첫제사상을 준비했다.


​'부모님 살아실 제 섬기기란 다하여라'라고 했듯이 평생을 함께 산 동생은 아버지께 최선을 다했고 그저 그렇게 평범하게 서로 지지고 볶으며 찐 가족의 케미로 함께 해줬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나는 결혼을 하면서 일찍 집을 떠났지만 큰 올케는 시집와서 지금까지 시부모님과 함께 하면서 엄마도 보내고 남은 아버지와 동생과 살고 있다. 그렇게 세 식구의 리얼한 삶의 이야기는 아버지를 통해서 듣는 것이 전부였고 아버지의 말씀들로 보자면 그들은 서로가 애증이라는 끈끈함으로 묶여 있고 사람 냄새가 나는, 내게는 든든한 친정이 되어주었다. 이제는 아버지가 안 계시지만 사람 좋은 올케와 착한 동생 덕분에 여전히 내게는 맘 편히 갈 수 있는 친정이고 아버지가 그립거나 핏줄이 땡기는 날엔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그곳이 그대로 건재한 것에 다시 한번 감사하다.





​살아생전 아버지의 중요한 아침 루틴은 온 가족을 위한 기도였다. 언제나 아버지 가방 속에 들어있는 오래된 수첩에는 힘 있고 좋은 필체로 우리 남매는 물론 일찍이 아버지 가슴에 큰 돌 하나를 얹어놓고 떠난 막내와 증손녀, 외증손녀의 생일까지 적어두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부처님께 축원을 올렸던 것이다.​

나는 간절했던 그 기도 덕분에 우리가 지금까지 무탈하게 잘 살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부처님한테 '~~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게 아니라고 배웠는데 우짜겠노 그쟈? 나도 사람인데... 내 자식들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 하게 되더라 ㅎㅎㅎ:;


그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 거린다. 매일 아침 아버지의 식솔들을 위한 기도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우리는 아버지가 우리를 위해 주셨던 기도의 힘으로 잘 살고 있는 줄을 알고 있고 여전히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면서 살고 있다.




​아버지의 첫 기일 아침에 동생네로 가서 제사 음식 만드는 것이라도 도와야지 하는 맘으로 채비를 하다가 퍼뜩 제 마음을 파고드는 생각 하나가 '오늘은 특별하게 의미도 있고 좋은 날이니까 108배 절을 할거나' 그리고 절을 하면서 문득 또 한 생각, '그냥 오늘부터 3년 동안 매일108배를 해볼까' 정말 그냥 스치는 한 생각으로 행동에 옮기기로 마음을 먹었고 9월 13일 오늘까지 잘하고 있다. 2025년 8월 26일이면 1000일이 조금 넘는 시간이고 아버지처럼 아침 루틴으로 좋은 습관을 들이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매일 같은 시간은 아니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로 실천하고 있다.(발가락 통증으로 108배는 한 달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끝났다)




하지만 아버지가 몸소 보여주신 주신 가르침을 내게 맞는 다른 방법으로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은 바로 경전 필사와 매일 아침 참회와 감사 기도를 하고 있다.


유독 삼 형제 중에 하나 딸이라며 아버지만의 방식으로 무한한 사랑해 주셨고 믿어 주었고 언제나 나의 편한 친구였고 든든한 지원군이었고 서로의 자랑이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했던 딸을 22살 어린 나이에 시집을 보내고 돌아오신 날은 2홉들이 소주 한 병을 다 마시고는 그렇게 우셨다고 한다. 당시 아버지는 술을 안 드셨는데 그 날을 계기고 다시 술을 드시게 되었고 머리가 아프기 전까지 술을 끊지 못하셨다.


결혼한 지 8년만에 애가 낳은 애들을 둘씩이나 데리고 청상이 되어 돌아왔을 때 울 아버지는 어떻게 견디셨을까? 아버지는 시집 보낸 것을 후회 하셨을 지도 모르고 그게 당신 탓이라는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다시 나의 지원군이 되어 주었고 외로워 하지는 않는지 울 지는 않는 지 가까이에서 지켜주셨고 온 마음으로 사랑을 주셨던 울 아버지, 돌아가신 지금도 여전히 나를 일깨우는 스승이 되어 주시는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다.


"아버지, 그래서 그냥 합니다. 아버지처럼"


아버지가 계셨다면 분명 이렇게 칭찬해 주셨을 거다.


그래 잘한다
내 딸이라 서라 아니라
우리 딸은 뭐 하나 못하는 게 없지
고맙다


​매일 눈뜨자마자 금강경 필사와 참회와 감사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버지처럼



나와 인연지으진 모든 존재가 언제나 자유롭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단,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은 한 가지는 내 자식들과는 애증의 관계가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 또한 쉽지 않다. 자식들이 부모의 마음을 다 모르듯이 부모 또한 자식의 가슴에 박힌 옹이를 다 알 수가 없으니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난 좋은 어른이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정작 내 자식들의 눈에는 아직 서툴고 자신들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강압적이고 무섭고 미운 엄마로만 남을까 두려워서 매일 아침 참회와 감사의 기도를 하면서 아들들 마음의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녹아내려서 편안해 지기를 기원한다.


든든한 내 편인 울아버지 많이 그립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짝사랑 아들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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