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한 것들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내면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
무상한 것들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운디드힐러 큐브-
불편하다면, 그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누구이고 무엇인가?
보고 있다면, 보고 있는 것은 누구이며 무엇인가?
행동하고 있다면, 그 행동을 하는 것은 누구인가?
화를 내고 있다면, 그 화를 내고 있는 이는 과연 누구일까?
이 모든 '누구'는 하나의 대상이고, '무엇'은 단지 지나가는 현상일 뿐이다.
모든 대상과 현상은 결국 변하고 사라지는 '무상(無常)'이다.
보고, 느끼고, 행하는 그 자체도 결국 자연의 흐름에 속한 일일 뿐.
이 모든 것이 무상하고 덧없는 것이라면, 좀 봐주자.
좋게 봐주고, 다정하게 봐주고, 예쁘게 봐주고, 사랑스럽게 봐주자.
더 따뜻하게 바라봐 주자. 그렇게 좋게, 아름답게,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서로를 감싸주자.
개가 짖을 때, 우리는 그 짖는 '현상'에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그 현상은 개의 본능적 표현일 뿐, 결국 일시적이고 변하는 것이다.
모든 대상은 무아(無我)이며, 현상은 무상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이 무상하다면, 나라는 존재조차 무상의 흐름 속에 있다.
무상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집착이 생기고,
그 집착으로 인해 버리지 못해, 소유하지 못해 고통이 찾아온다.
그 고통마저도 무상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흐른다.
대상도, 현상도 변화의 법칙 아래에 놓여 있다.
그래서 결국, 누군가가 '보는' 것이 아니라 '봄'이라는 현상이 존재할 뿐이다.
귀찮음도 하나의 감정이며, 그 감정을 바라보는 일도 하나의 현상일 뿐.
'귀찮음'이 누구에게 주어졌는지 묻는다면,
그조차 또 다른 일시적 현상을 보는 것일 뿐이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 한낱 변하는 현상임을 안다면,
대상의 아름다움이나 추함을 판단하기보다
서로를 따뜻하게, 좋게,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일이 더 소중하지 않을까.
핸드폰을 붙잡고 있는 것도,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것도
그저 지나가는 현상에 불과하다.
싱숭생숭한 기분도 스쳐 가는 감정이며,
이 모든 것을 그저 관찰하는 '지켜봄'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반영되는 거울이다.
거울 속에서 서로를 비추고 또 비추며, 존재를 알아간다.
'나'라 부르는 것은 단지 하나의 상징일 뿐,
그 이름조차 진정한 나를 대신하지 못한다.
피곤하면 잠을 자고, 귀찮으면 미루기도 하고,
때로는 무시하려 애쓰며 살아간다.
이 모든 반응과 행위들은 그저 바라보는 또 다른 현상일 뿐이다.
우리는 인생의 '관객'이면서 동시에 '주인공'이다.
행하는 나를 보고, 보고 있는 나를 다시 바라보는 이 반복 속에서
내면의 변화가 시작된다.
결국 모든 것은 내면에서 바라보는 것이 드러나는 현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 현상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일이
우리가 사는 삶 속에 담긴 진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