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힐링큐브 Jun 22. 2024

인성교육이란 무엇인가?

인성교육의 목적

교육의 목적은 알지 못하는 것을 깨 닳는 데 있습니다.

지식의 주입과 지식의 습득이 아닌 사람의 성장이 목적인 것이지요.

생각이 넓어지고 마음의 눈이 떠지고 자신의 삶을 창조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교육입니다.

교육은 평생 하는 것 이죠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삶을 창조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는 동안 평생을 꾸준하게 그리고 천천히 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고와 비극을 예방하는 방법 중 가장 좋은 방법이 교육이며,

마음을 치유하고 병들기 전에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 또한 교육입니다.

하지만 그 중요한 교육이 병이 들면 그 교육을 받는 사람들도 병이 들게 됩니다. 북한의 세뇌 교육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북한만 사람이 병드는 세뇌 교육을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교육도 강도만 다를 뿐 마음을 병들게 하는 교육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망치고 마음을 병들게 하는 교육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기도 합니다.

인성교육의 중요성은 많이 이야기하지만 무엇이 건강한 교육이고 무엇이 병든 교육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전무하다 느꼈기에 인성교육이란 무엇인가를 한번 나눠볼까 합니다.

먼저 인성교육이란 무엇일까요?

교육이니까 무조건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오류에 빠진 분들도 많지만 인성에 대해 고민조차도 안 해보신 분들이 더욱더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인성이란 개인이 가지는 사고와 태도 및 행동 특성을 말합니다.

사람의 성품인 것이죠.

성품을 교육한다?

어떻게 말입니까?

착하게?

무조건 말만 잘 듣게?

과거 독일은 선진교육이라 불리는 주입식 교육방법의 대표 국가이자 수출국가였습니다.

기계처럼 공부시키고,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국가가 하는 것은 무조건 옳은 것이라는 세뇌를 통해 정답을 주입하는
교육으로 빠른 게 지식을 습득을 시켰습니다.

세뇌의 본질은 권력단체가 정한 답을 정답처럼 믿게 사고를 훈련을 시키고 정답을 주입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옳은 답(진실)이 아닌 권력단체가 정한 답(거짓)을 믿게 만듭니다.

진실과 거짓이 권력단체의 의도에 따라 뒤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육은 세계사에 남을 무서운 괴물을 낳았습니다.
바로 전쟁과 우월주의입니다.


정글 같은 경쟁사회에서 우리들이 배운 교육은
친구들이 넘어지면 밟고 가라는 살벌한 교육이었습니다.


친구가 나보다 실력이 떨어져야 내가 더 높아지고 나보다 실력이 좋은 친구가 넘어지면 속으로는 기뻐하는 교육이었습니다.


우리가 배워온 윤리와 너무나도 모순된 교육방식은 무의식 적인  죄책감을 심어 주었습니다. 친구를 밟고 이뤄낸 성공이 행복할리 없는데 말입니다.

주위의 실수가 나에게 피해를 주면 자신이 손해를 보았다는 믿음에 치우쳐 보상받는데 연연했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 보이지 않는 진실은 외면했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 마냥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학교에서의 인성교육 부재를 말하고 있지만
사실 학교의 인성교육은 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제도 자체가 바뀌지 않는 이상 별도의 인성교육프로그램은 학부모들의 이기주의에 의해 시행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적 중심의 지식교육과 입시교육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만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인성을 가지려면 예절교육, 정서교육, 윤리교육, 이라는 추상적이고 생각을 깊게 하는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학문이 들어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은 지식 교육이 아닌 자신의 인격을 수양할 수 있는 가치와 규범을 교육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깊게 하는 철학적 교육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흔히들 철학을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라 오해하시는데,
생각을 많이 하는 것과 생각을 깊게 하는 것은 방향성 자체가 다릅니다. 철학은 생각을 깊게 하는 것이지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성교육은 자신의 말과 행동 사고방식 등을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훈련을 통해 스스로의 성품을 닦을 수 있게 교육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인정받고, 공감하며, 세상을 바라볼 때 보이지 않는 진실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삶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납니다.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선택하고, 선택한 가치에 맞춰 삶을 계척 하는 과정 속에서 크고 작은 성취에 만족하고 기뻐하는 삶을 만들어 가면 행복이라는 선물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성품을 교육한다면서 인성조차도 주입시키면 해결될 거라 믿는 사회가 전 두렵습니다.

인성교육은 자기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방법을 배우는 교육입니다.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방법은 밖에 있지 않고 자신의 내면 속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심리적 현실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는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정한 정답을 믿고 정답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지 분리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 수준은 되어야 합니다.

흔히들 거짓말은 나쁜다.라고 정답을 정해서 주입식 교육을 합니다. 그래서 거짓말은 나쁜 짓이라고 비판 없이 주입이 됩니다.

무엇 때문에 정말 나쁜지에 대한 과정이 생략되고 나쁘다는 결과만 주입되는 것입니다.

이건 엄밀히 말하면 교육이 아니라 기만입니다.

왜냐하면 교육은 문제해결과정을 습득하는 것인데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만 얻으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걸 비유로 든다면 수학 문제를 푸는데 풀이과정은 건너뛰고 답만 외우는 것입니다.

풀이 과정을 모르고 답만 외운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답을 주입하는 사람들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 답을 만드는 사람들은 지배자가 되는 것이고
답을 믿는 사람들은 피지배자가 되어 버립니다.

앞에도 적어 놨지만 세뇌에는 2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 조건 정답을 믿는 사고방식의 훈련

두 번째 조건 정답의 주입

세뇌를 시키는 입장에서는 세뇌를 시키면 시킬수록 더 확고한 지배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정답을 만들고 만든 정답을 주입하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 또한 나를 지배하기 위해 자신이 답을 만들고 자신이 만든 답을 주입해 자신을 지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놀랍게도 대상 심리학에서는 상전과 노예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내면에 지배하는 나와 지배당하는 나가 분열되어 한쪽은 상전이 되고 한쪽은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주로 경쟁력이 높다 믿는 나는 상전이 되고

경쟁력이 떨어진다 믿는 나는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면에 차별하는 사고를 가지게 되면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지옥으로 안내를 하게 됩니다.

내가 정한 답을 정답처럼 믿게 사고를 훈련을 시키고 자신이 정답을 주입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자신을 세뇌시켜 자기 지배력을 올리는 방법은 필연적으로 자기를 파괴시키는 심각한 부작용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한심하다. 나는 못났다. 나는 게으르다 등 자신을 비난하여 노예로 부리기 위해 스스로를 깍아내리고 스스로를 파괴하기도 합니다.

정답을 믿는 사고방식은 정답을 만드는 사람에게 지배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이 되려면 정답을 믿는 사고방식을 놓아버리고 스스로가 원하는 가치를 믿는 방식으로 수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거짓말하는 것은 나쁘다"는 것을 자녀에게 전달하고 싶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일까요?

그냥 거짓말하면 나쁜 것이고 나쁘기에 체벌하는 것이 바른 교육일까요?


아니면 도덕적으로 거짓말은 나쁜 것이다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바른 교육일까요?

깨달으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게 되고, 보이게 되면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정말 바른 인성교육이란 스스로가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생각하며, 마시멜로 이야기에서 나오는 마하트마 간디의 아들이 그 자녀 아룬간디에게 준 교훈 중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아버지는 아룬에게 덜덜거리는 소리가 나는 차를 정비소에 맡기길 부탁했다.

" ……. 늦어도 오후 다섯 시까지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너라."

아룬이 정비소에 맡긴 차는 생각보다 매우 빨리 12시에 고쳐졌다.

아룬은 남은 시간 영화를 보기로 했다.

동시 상영하는 영화 중 한편만 보려 했지만,
영화에 빠진 아론은 나머지 두 편을 연속해서 보고 말았다.

시계를 보니 6시 5분. 집에 도착할 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도착하자 아버지는 근심과 안도감이 동시에 교차하는 얼굴로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아. 네게 무슨 사고라고 생기지나 않았는지 무척 걱정했단다. 무슨 일이 있었니?"

아룬은 갑자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어휴, 어리석은 정비사들 때문에 이렇게 늦었어요. 그 사람들, 고장 원인을 좀처럼 찾지 못하다가 겨우 수리를 끝냈어요. 곧장 달려왔는데, 너무 늦었네요. 정말 죄송해요."

아버지는 약간 의아한 표정이었다.

잠시잠깐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으나 다시 침착함을 찾은 듯했다.

아버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룬은 이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며 열심히 딴전을 피웠다.

"이제 덜덜거리는 소리는 나지 않을 거예요. 타세요, 아버지"

"아들아, 차를 몰고 집으로 가거라. 나는 걸어가겠다."

"네? 아머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못 들었느냐? 난 집에까지 걸어가련다."

아들은 몹시 당황했다.

사무실에서 집에까지는 15킬로가 넘는, 걷기엔 너무나 먼 거리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아버지는 침착하고 위엄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아, 나는 지난 17년 동안 너를 올바르게 키우고자 노력했단다.

그런데 너에게 신뢰를 심어주지 못했구나. 나는 아버지로서 자격이 없다.

어떻게 해야 더 훌륭한 아버지가 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집까지 걸어가야겠다.

그리고 네가 거짓말을 할 정도로 내가 그렇게 나쁜 아버지였다면, 부디 나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

아버지는 약속시간에 맞춰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는 아들이 걱정되어, 정비소에 전화를 걸어 전후사정을 모두 파악한 상태였지만 아룬에게는 그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들은 차를 천천히 몰며 아버지 뒤를 따르며 울먹였지만,

아버지는 잠자코 고개만 저었다.

"아니다, 아들아! 너 먼저 가거라, 어서 집으로 가라."

아버지는 끝끝내 아들의 청을 거절했다.

결국 두 사람은 5시간이 지나 자정 무렵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한 아버지는 아무런 말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아룬간디 이야기 마시멜로이야기 중-

아버지는 아들에게 거짓말은 나쁘다 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이 무엇 때문에 나쁜지 스스로가 과정을 체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진실(거짓 없는 사실)을  스스로 알기 원했습니다.

거짓말했다는 사실을 추궁하기보다는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줘서 세상을 넓게 보라는 무언의 가르침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아룬은 다시는 거짓말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아버지의 숨은 진실을 아들이 이해한 결과인 것이며
인성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글입니다.

인간의 성품을 교육하는 것은
자신이 자신을 교육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의 교육은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교육이 되어가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정답을 주입하는 주입식 교육은 필연적으로 사람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인생에는 정답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지만 정답을 주입하는 교육으로 인해 우리의 사고방식은 정답이라는 환상을 믿도록 세뇌되어 있습니다.

교육의 목적은 능력과 경쟁이 전부가 아니라 문제해결능력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력을 함께 학습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북유럽의 선진화된 국가들은 정답을 주입하는 교육과 경쟁교육을 순차적으로 폐지하고 있지만 우리의 교육은 여전히 정답을 주입하고 경쟁시키는 교육을 지향합니다.

경쟁의 본질은 싸움을 붙여 이기는 것에 있습니다.

과정은 생략되고 결과만 중시하는 사고방식은 마음을 병들게 만듭니다.

안타깝게도 정답을 믿는 사고습관과 경쟁시키는 사고습관은
자신이 믿는 정답과 다른 행동을 했을 때 자신이 믿는 정답을 기준으로 비판과 심판을 하며 시비를 따지며 싸우게 만듭니다.

가령 나는 열심히 살아야 한다를 정답으로 믿는다면

열심히 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열심히 살지 못하는 자신을 정답이 틀린 사람으로 인지하게 되어 스스로를 비판을 하고 시비를 따지며 심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과 자신이 싸우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싸우면서 살아간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내가 믿는 정답으로 인해 자신과 자신이 싸우고
심판을 받는 모순에 빠지는 것입니다.

열심히 사는 건 미덕이며 가치 있는 추구지 정답이 아닙니다.

정말 자신의 사고방식을 깊게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자신이 원하는 가치나 미덕을 믿기보다는 정답을 믿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정답을 주입당해 온 사회환경으로 인해 정답을 믿는 사고방식으로 세뇌가 되면 자신 또한 자신이 정한 답을 정답으로 만들어 믿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우리가 믿는 대부분의 정답은 올바른 답이 아니라

힘과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 만든 답, 정한 답이 대부분입니다.

아이의 관점에서 부모는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절대권력자입니다. 그렇기에 부모가 자신이 정한 답을 아이에게 주입하면 아이는 부모님이 주입한 정답에 세뇌가 됩니다.

그래서 부모가 아이이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정답을 주입하며 키우게 되면 아이는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될 때 부모에게 조차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자라게 됩니다.

북한만 세뇌를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자신에게 세뇌를 시키고 있고
사회도 세뇌를 시키고 있습니다.

정답을 주입하는 교육은 안타깝게 세뇌가 본질이기에 사람을 망가트립니다.

그렇기에 건강한 정신을 원한다면 정답을 믿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믿는 사고방식으로 수정해야 합니다.

- 침묵의 대가- 마틴 니뮐러

독일에 처음 나치가 등장했을 때.
처음에 그들은 유태인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어요.
왜 나면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거든요.

그다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어요.
왜 나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거든요.

그다음에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어요.
왜 나면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그다음엔 노동운동가들을 잡아갔습니다.
나는 이때도 침묵했어요.
왜 나면 나는 노동운동가가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이제는 가톨릭 교도와 기독교인들을 잡아갔어요
역시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가톨릭도 기독교인도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어느 날부터 내 이웃들이 잡혀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어요.
나는 그들을 잘 알지 못하니까요.

그리고 어느 날은 내 친구들이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때도 침묵했어요.
나는 내 가족들이 더 소중했거든요.

그리고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내 주위에는 나를 위해 이야기해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침묵을 했었을 까요?

믿었던 정답은 무엇이었을 까요?

인생에 정말 정답이 있을 수 있나요?


나의 삶은 내가 개척해 나가는 것 이기에 내가 믿는 정답은 결국 옳은 답이 아니라 내가 정한 답이 되어 버립니다.

답을 정한 건 바로 너라는 답정너라는 신조어만 봐도 잘 알 수 있죠.

내가 믿었던 정답은 정말 정답이었을까요?

내가 정한 답으로 인해 자신이 불행하고 괴로워지는 모순에서 벗어나려면 정답을 믿는 사고 습관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믿는 사고 습관으로 수정을 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다행인 건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음이 원하는 올바른 길을 스스로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룬간디의 이야기처럼 스스로가 원하는 가치를 마음에서 찾을 수 있게 돕는 교육이 참된 인성교육이 아닐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심리적 현실과 사랑의 대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