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내 생일을 거의 항상 잊어버려서 며칠 지난 다음에야 날짜를 따져보곤 한 마디 하셨다. 음력 5월에 태어난 내 생일이 모내기로 한창 바쁜 6월 초에 박혀있기 때문이었다. 국수와 명이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으나, 국수는 그러니까 당시 우리 가족의 저녁식사였다. 칼국수를 좋아하시는 아버지의 식성을 물려받아 나를 제외한 가족 모두 좋아하는 음식이었으니까. 덕분에 엄마는 항상 즉석 손칼국수를 만드셨다.
부모님은 서울에서 거주하며 막내까지 출산한 뒤에 여주로 내려와 농사를 시작했다. 특수작물 실험농사를 하셨기 때문에 해가 지날수록 바빠졌다. 처음 구경꾼이었던 엄마의 농사일 비중이 많아지자 아빠는 반죽만 만들면 국수를 뽑아낼 수 있는 국수틀을 사 오셨다. 저녁이 되면 우리 자매들은 마루에 교자상을 펴고 국수틀을 설치하곤 점심에 엄마가 만들어놓은 반죽을 틀에 넣어 얇고도 찰진 규격으로 재단하고 그것을 다시 틀에 넣어 면을 뽑았다. 언니의 의견으로 야채를 다듬어놓으면 엄마가 들어와서 순식간에 국수를 만들었다. 그렇게 바쁜 세월이었으니 생일이란 농번기에 묻혀서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 의례였다. 9월생인 언니 역시 기억하기엔 너무 바쁜 계절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여동생을 부러워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나는 생일을 찾았다. 세심한 남편이 해마다 생일축하 이벤트를 마련해준다. 올해는 윤달이 있어서 조금 늦어졌다. 다음 주에 2박 3일간 생일여행을 가기로 했다. 여행은 떠날 때보다 준비할 때가 중요하다. 장소와 시일을 계획하고 나의 부재가 일상에 미칠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율하는 것도 여행준비다. 하지만, 실제로 여행 중에 필요한 것을 챙기는 과정이야말로 여행의 질을 결정한다. 1박이나 1주일이나, 일단 집이 아닌 곳에서 잠들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챙겨야 하니까.
자녀를 양육하면서 여행 준비물은 각자 스스로 챙기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먼저 여행준비 목록을 만들도록 하고 빠진 것들은 목록에 추가하도록 점검해 주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다닐때까지는 아이들이 잠들면 가만히 챙긴 물건을 확인하고 빠진 것이 있으면 다음날 가볍게 질문했다. 그래도 안 챙기고 출발하면 그대로 보냈다. 불편을 겪고 돌아와서 후회도 하고 원망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행착오 할 기회를 주는 것이 괴롭고 안타깝지만 부모로서 참아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아들은 수련회에 수건을 챙겨가지 않아서 낭패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친구의 것을 빌려 쓰고 빨아놓았는데, 다음날 마르지 않아서 드라이어로 말려주느라 고생했다고 한다. 다음날은 미안해서 또 다른 친구의 수건을 빌려 썼는데 물기도 빨리 흡수하고 사용한 직후에 빨아서 짜놓기만 하면 다음에 다시 쓸 수 있는 스포츠 수건이었다. 유레카를 외치고 돌아온 아들은 그 후에 스포츠 수건을 마련해서 애용하고 있다. 경험 덕분에 득템을 한 셈이었다.
발효차와 티백 허브티와 거름망
나의 여행 준비물도 기본적인 리스트는 아이들과 같다. 그 외에 또 무엇을 챙길까. 내 경우는 행복한 여행을 위해 준비하는 1순위가 발효차와 종류별 티백 허브차다. 어디에 가든 쉽게 커피를 사 먹을 수 있지만, 내가 마시고 싶은 차들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챙기는 것이 차와 텀블러(휴대용 티 메이커), 그리고 작은 거름망이다. 잎차를 간편하게 먹기엔 최소한의 도구가 필요하기 마련이므로. 차는 나에게 소화제이며 신경안정제이며 컨디션 조절제이며 변비 해소제다. 또한 아침과 숙소에서의 저녁 마무리를 안정감 있게 만들어주는 일상힐링의 매개이자 필요충분조건이다.
여행 중엔 변수가 많다. 다양한 체험에 나를 내어 맡기면서도 주체로서 중심을 붙드는 시간이 필요하다. 여행이 길다면 그런 시간은 더욱 필요하다. 그래서 늘 차를 챙긴다. 차와 관련된 여행에피소드가 줄줄이 떠오른다. 소중하고 즐거운 체험들이다.
장편소설 [황색점멸신호]를 탈고하기 위해 토지문화관에 입주했을 때였다. 매주 토요일 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주일을 가족과 보낸 후에 다시 토지문화관 숙소로 돌아갔다. 그때마다 차를 종류별로 챙겨가서 한쪽에 진열해 놓았다. 귀래관이었던 내 방의 맞은편에 입주한 다른 작가 분은 원두커피를 유리병에 담아와서 냉장 보관하고 있었다. 우리는 즐겁게 물물교환 했다.
토지문화관, 원주 흥업면 매지리 문화마을 풍경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이 모여 있으나 저마다 목표한 작업량이 있으므로 조식을 챙겨 먹기 위해 식당이나 휴게소에 들르거나 점심 저녁에 식사 시간 후에 산책을 할 때 잠깐씩 얼굴을 보았다. 당시 소설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소설가들과 어울렸다. 몇몇 분들과 복숭아밭까지 걸어서 올라가거나 저수지까지 산책을 하는 거였다. 연세대학교 원주분교의 도서관에 갔다가 종종 호수 주변을 산책하거나 휴게소에 모여 식사 후 담소를 나눌 때도 내가 가져간 차를 나눠마셨다. 당시 입주했던 한 시인에게 차를 대접했더니 내게 큰언니라고 별칭을 붙여주었다.
아름다운 금계국이 피어있던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의 문화마을이 기억에 환하다. 박경리 선생님의 생가와 손때 묻은 장독대와 구슬땀을 흘려 지은 농산물로 식재료를 대주시던 텃밭과 박물관이 있는 곳이다. 토지문화관은 작가들에겐 문학적 영감과 긍지와 책임감을 수혈하는 곳이다. 한국문학을 사랑하신 선생께서 후배작가들에게 진정한 휴식과 충전을 제공하는 창작관을 마련해 주신 덕분에 귀중한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문학사의 거목인 선생께 마음 깊이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여행을 하면 남성은 평소보다 절제하고 여성은 평소보다 많이 섭취한다고 한다. 남성은 비상시에는 최대한 모든 것을 절제하고, 여성은 비상시에는 위기에 대비해 에너지를 비축하려는 본능이 있어 여행을 마치고 나면 여성은 몸무게가 늘어있고 남성은 빠져있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실제로 여행을 나서면 평소의 식단을 벗어나 동반자와 어울려 맛집을 찾아가 색다른 요리들을 많이 섭취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여행이 누적될수록 몸은 무거워진다. 배출이 안되거나 민감한 사람은 물갈이 설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차를 가져가면 그 모든 것을 웬만큼은 조절할 수 있다. 중년이 되고 보니 여행을 떠나면 컨디션 관리가 중요해진다. 무리한 여행 스케줄도 가뿐히 소화하던 젊은 시절엔 상상도 못 했던 증상으로 민폐를 끼쳐 여행을 망쳐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든 지인이든 동반자들에게 걱정거리가 되는 것만은 예방하고 싶다. 요즘엔 어디를 가든 차를 파는 카페가 많으니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원할 때 내가 편안한 곳에서 나에게 주고 싶은 차는 스스로 준비할 수밖에 없다.
여행을 떠나면 유목적 삶을 체험하게 된다. 그것이 여행의 목적은 아닐지라도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 여행의 콘셉트와 소비의 수준과 기간과 준비의 정도에 따라 체험의 깊이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 말이다. 짧은 2박 3일이지만 이번 여행에서 체험할 유목적 삶은 또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까? 어서 차를 챙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