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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링가객 Jan 31. 2024

에필로그 -녹차밭 힐링여행

일상힐링 레시피


  따끈한 찻잔에 언 손을 녹이며      


 유난히 폭설이 잦은 겨울을 보내고 있다. 첫눈 타령을 한 12월 중순부터 여러 차례 폭설이 내렸다. 캐럴송 가사처럼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했는데 충족이 되었다.  새해도 흰눈 속에서 맞이했다. 긴 세월이 지난 후에 이번 겨울을 기억하면 은색의 배경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날도 추웠다. 혹한의 날들을 지내는 동안 따끈한 찻잔에 언 손을 녹이며 보냈다.      


 코로나 판데믹이 길어지면서 공간 이동과 거리 제한으로 인해 우울한 시간을 보냈다. 그래선지 거리제한의 해제와 함께 마음이 동요하여 여행하고픈 욕구가 폭발했다. 차 에세이를 쓰는 지난 1년간 내 여행지는 주로 차밭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딜 가든 차밭을 중심으로 코스를 정했다. 에필로그에서 최근에 다녀온 녹차밭 코스를 소개할 수 있어서 기쁘다. 녹차애호가이거나 지역민이 아닌 분들에겐 비교적 덜 알려진 곳들이다. 몸과 마음의 치유를 위해 힐링이 필요한 분에게 이 글이 공유되길 바란다.     


 한국의 대표 관광지로 이름난 곳들, 차 애호가가 아닌 분들에게도 충분히 알려진 제주도 오설록이나 차 시배지가 있는 하동군 화개동천이나 보성군의 제다원은 제외하였다. 내가 아니어도 다룬 자료가 많고 정보도 충분히 공개되어 있어 누구나 접근 가능한 곳이기 때문이다.            

   



  강진의 월출산 야생차     


 아껴두고 마시던 감잎차를 소진하기 전에 햇차를 구하러 가기로 했지만, 어쩐 일인지 나서기도 전에 번번이 무산되었다. 이렇게 애정을 품게 만든 감잎차는 코로나 판데믹 선언 직전에 찾아간 강진에서 인연이 되었다. 다산초당 백련사 입구에 자리한 아담한 차방에서 만난 제다인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녹차를 청했더니 몸피가 여린 팽주님이 감잎차를 먼저 내주었다. 그 달콤한 향기와 감미에 눈이 확 맑아지는 경험을 얻었다. 절친한 친구네 과원에서 어린 감잎을 따서 덖었다는 제다인은 듣는 내 귀가 공손해질 정도로 겸손했다. 감잎차를 마시고 단향에 취해 흐믓해져서 백련사 전망대에 올라서서 호수처럼 정겨운 강진만을 감상했다.      


 찬바람을 쐬고 차방으로 돌아가 팽주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녹차와 발효차를 차례로 시음했다. 월출산에서 체취한 야생차로 덖은 녹차와 발효차도 특품이었다. 생활차인에겐 좋은 녹차를 만나고 제다인과 조우하는 순간이 귀중하다. 차를 안고 돌아설 땐 조만간 다시 찾으리라 마음먹었으나 판데믹 선언으로 2년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름도 묻지 못한 제다인의 감잎차를 마시는 동안 마음이 참 부요했다. 녹차를 마실 수 없는 시간이면 감잎차를 마셨다. 특히 눈이 피로한 저녁시간에 카페인 걱정 없이 피로감을 달래기엔 감잎차가 그만이었다. 녹차를 마시기에 조심스러운 분들께도 편안하고 향기로워서 대접하기 좋은 차였다. 그러는 사이에 묵은 차를 다 소진하게 되어 질 좋은 감잎차를 구하는 것이 숙제가 되었다. 가까운 숍에서 티백으로 포장한 감잎차를 구했으나 입맛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맛이었다.      


 좋은 보이차를 마시던 시절이 있었다. 다 소진해 버리고 더 이상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깨달았다. 등급이 좋은 차를 마시면 등급만큼 높은 기준이 생긴다는 걸. 혀와 몸이 그 기준을 간직하기 때문에 웬만한 맛에 만족할 줄 모른다는 것도. 한 마디로 입맛을 버린 것이다.      


녹차의 경우 각각의 차 맛에는 상응하는 매력이 있어 음미할수록 풍성하게 차를 즐길 수 있다. 녹차를 마실 때마다 즐거운 이유다. 그런데 감잎차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마치 좋은 보이차를 마신 것처럼 몹쓸 기준을 보유하게 된 셈이었다. 새해 첫 달을 보내기 전에 남도 출장을 계획한 짝꿍에게 차밭 코스를 첨가해 달라고 청하며 따라나선 이유였다.



 

 강진은 다산초당으로 유명하다. 다산이 차와 사귀게 된 것도 월출산 야생녹차에 감동받았기 때문이었으리라. 내가 사는 지역에서 다산의 생가가 가깝다. 계절이 변할 때마다 찾아가거나 맞은편 강가에서 건너다보며 다산을 생각한다. 그래선지 심정적으로 친숙하게 느껴진다. 다산초당으로 통하는 백련사가 이번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였다.      


 백련사는 2~3년 사이에 낯선 곳이 되었다. 연못이 없어지고 입구가 공사로 사뭇 달라져있었다. 입구의 차방은 문이 닫혀 있어서 부풀었던 기대를 무너뜨렸다. 운 좋게 신도 한 분을 만나 소식을 물었다. 그 분이 친절하게 전화 연락을 해준 덕분에 주인장을 만났다.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백련사 입구의 차방. 멀리 강진만이 내려다보이는 차탁에 앉아개완에 담긴 녹차와 황차를 음미했다


  

 기대하던 제다인이 아니라 차를 청하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짝꿍은 발효차를 나는 작설차를 주문했다. 차 맛은 기대 이상 좋은데, 감잎차는 메뉴에도 매대에도 없었다. 전에 있던 제다인의 소식을 들었다. 코로나로 인해 고생 많이 하다가 차방을 인계하고 떠났다는 거였다. 연락이 되냐고 물었다. 팽주님 대답이 허망했다.     

 “떠나곤 못 봤어요. 그 분은 연고가 없어 이 쪽으론 올 일이 없지요.”     


 일말의 기대마저 허물어뜨리는 대답이었다. 묵묵히 차를 마셨다. 야생차 본연의 맛이었다. 짝꿍과 다른 차를 주문했기에 우리는 찻잎이 다 우러나도록 두 종류의 차를 충분히 마시고 차를 구입했다.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다시 만난 월출산 야생차 덕분에 마음이 조금은 채워졌다. 새로 오신 팽주님도 직접 차를 채취하고 덖는 제다인이었다. 사람은 오고 가지만 다루는 손이 바뀔 뿐 차는 거기 있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오설록 강진다원   


 지난번에 왔을 때도 폭설이 왔는데, 이번에도 폭설이 내렸다. 강진에 왔으니 보지 않을 수 없는 백운별서정원을 돌아보았다. 은빛 눈 속에 파묻힌 차 밭을 둘러보았다. 오설록 강진다원이었다. 넓고 아름다운 눈밭이 한 눈에 다 담기지 않을만큼 펼쳐져 있었다. 차밭의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고랑을 타고 구불구불 펼쳐진 차밭을 보면 마음속이 푸르름으로 그득찬다. 고운 눈을 머리에 가득 이고 있는 겨울 차밭을 바라보며 마음속이 상쾌하게 비워졌다.  쌓이는 즉시 훼손되는 도심의 눈과 달리 몇날며칠 폭설에 쌓여있는 차나무들을 보는 것도 장관이었다.      



오설록 강진다원, 월출산 아래 백운 별서 정원 근처에 있다.

 가볍게 점심을 먹고 지난 번에 왔을 때 생가터를 둘러보았던 다농명가를 찾았다. 최초로 조선의 녹차를 상품화했던 이한영 제다명인의 다원이었다. 5대손 손녀가 복원을 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터였다. 시간별로 대여해 주는 차실을 예약하고 백운옥판차를 시음했다. 녹차와 다과를 바구니에 담아주었다. 안내를 받고 안채로 들어가 차실 중 한 방에 들어갔다. 월출산 남쪽 마을이라 산을 배경으로 풍경을 음미하며 다도를 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한옥 다실의 정갈함과 따스함이 처마에 주루룩 달린 고드름처럼 정겨웠다.





 차와 다식을 달게 먹었다. 차 맛은 오전에 취한 월출산 야생차 향기를 몰아낼 만큼 특별하지 않았다. 마시기에 괜찮은 정도였다. 어찌 생각하면 야생차를 먼저 마신 영향일 수도 있었다. 그 날 처음 마신 차가 다음에 마시는 차의 기준이 되기도 하고, 특품차마신 후에는 그 이후 부터는 차 맛의 섬세한 차이를 놓치기도 한다 차를 음미할 때는 여러 변수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시음과 차맛의 품평은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니 오해 마시길. 어느 에는 여릿한 녹향이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니.      



  월인천강 나비황차원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은 목포항에서 보냈다. 점심 전에 함평 근처에 궁금한 차밭이 있어서 검색한 주소를 치고 달려갔다. 미지의 목적지를 여행지로 정하면 설레임이 남다르다. 여행의 맛 중에 하나인데,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상상하던 풍경과 실제의 풍경 사이의 괴리를 좁혀가는 순간이 즐겁다. 차를 재배했다는 역사적 기록을 복원하여 함평에서 차농사를 짓는 제다인에 관한 자료를 확인하고 싶었다.      


 황금박쥐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성정마을이라니, 궁금증을 잔뜩 안고 찾아간 마을은 휑하게 빈 느낌이었다. 대나무가 빽빽한 야산에는 차밭은커녕 제다원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월인천강 나비황차원이 이런 곳에 있을리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마을길을 걸었다. 눈에 푹푹 빠지면서. 차밭 찾기를 포기하고 내려와 차를 돌리려는데 산 쪽에서 노인 한 분이 내려오셨다. 용기를 내어 여쭸더니 안내해주신다.      


 “산 속에 차밭이 있으니 여기선 안 봬요. 그래도 차는 일본서도 가져가고 중국서도 가져간다데요. 내가 그 엄마요. 차 돌릴만큼 올라가면 윗집에 사람 있을거라. 차 한잔 하고 가소.”     


 이처럼 반가운 소식도 없을 거였다. 노파가 손짓한 곳으로 올라갔다. 과연 건물이 있었다. 눈썰매 자국이 있는 눈길은 미끄러웠다. 폭설이 산골짝의 길들을 푹신하게 덮고 있었다. 겨우내 걷히지 않을 듯한 이색적인 길이었다. 오지에 다다른 느낌으로 짝꿍의 도움을 받으며 집 마당에 올라 옛사람이 ‘이리 오너라’ 하듯 ‘계세요?’ 하고 외쳤다. 문이 열리더니 두건을 멋들어지게 쓴 키가 큰 중년의 남자분이 나왔다. 환대를 해주셔서 다원 안으로 들어갔다.      



대나무에 둘러쌓인 월인천강 나비황차원과 차방에서 대접받은 발효황차


 연구소를 방불할 만큼 한쪽 벽면에 자료들이 쌓여있는 차방은 운치있게 통창을 낸 원목 집이었다. 직접 지었다고 했다. 이력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기사에서 본 기억으론 회사원을 접고 차를 배워 귀농을 하여 차농사를 짓는다고 했는데, 집도 손수 짓는다고? 한 사람이 너무 다양한 삶을 사는 것 아닌가! 뿐만이 아니었다. 차방에는 대나무를 깎아 만든 죽통이 멋들어진 공예품으로 장식되어 있고, 시화도 많이 걸려 있었다.      


 효천 김정석 다인과의 만남은 그렇게 신기하고 재미있게 이루어졌다. 황차를 시작으로 발효도가 다른 여러 차를 맛보았다. 두어 시간 머물면서 귀하고 뒷심이 좋은 차들을 마셨다. 마시는 동안 목과 등이 후끈해져서 외투를 벗었다. 대나무 통을 갈라서 보이차처럼 굳어진 차를 떼어 우린 죽통차가 특히 맛이 좋았다. 죽향이 은은하게 배어 순한듯 부드러운 차는 신선한 산미와 함께 감칠맛이 특별했고, 산뜻했다.  



 차에 제 2의 생을 바치기로 작정하고 야생의 환경에서 차를 재배한 다인이 애정을 듬뿍 들여 덖어낸 차들은 치유의 힘이 느껴졌다. 마시면서 실시간으로 체온이 올라가고 기운이 뻗치는 느낌은 좋은 차를 마셨을 때만 경험하는 거였다. 시간이 여유롭지 않아 아쉬웠다. 월인천강 나비황차원을 체험할 수 있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후일을 기약하고 돌아왔다.      


대나무 안에 차를 넣어 발효시킨 죽통차. 출고하기 직전에 소비자가 꺼내 마실 수 있도록 개봉한다.



짧은 남도여행 덕분에 힐링도 하고 남은 겨울을 향기롭게 보낼 차도 구했다. 햇차가 나올 때까지 아쉽지 않게 차 벗들과 복된 시간을 쌓아올릴 생각에 마음이 벅차다.






* <일상힐링 레시피> 연재 글을 마칩니다. 그 동안 함께 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응원과 댓글로 따스한 소통을 나눠주신 작가님들 덕분에 즐겁게 저의 힐링 레시피를 돌아보고 공유할 수 있었어요. 앞으로 차에 관한 글은 이전에 진행하던 <소설가의 다실> 매거진에 올리겠습니다. 저는 더 진솔한 이야기와 자유로운 주제의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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