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였다. 짝꿍과 함께 오랜만에 단골 찻집에 가려는데 딸이 끼어들었다. 아기는 어쩌고 혼자냐고 물었더니 쌩긋 웃었다.
“교대로 육아휴식 하는데 내 차례라 엄마아빠랑 시간 보내려고요.”
아기 엄마에게 몇 시간이라도 육아 휴식시간을 주기 위해 사위가 손자를 데리고 친가에 갔다는 거였다. 전날 딸이 혼자 손자를 데려왔던이유도 알게 되었다. 지혜로운 방법이었다. 원 가족이 지척에 있어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요즘은 아기가 드물어 사돈지간에 아이 하나만 바라보고 있는 경우도 많다. 사돈도 모처럼 손자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길 바랄 뿐이다.
우리의 외출 계획을 말했더니 딸이격하게 동조했다. 마침 감기 기운이 있어서 따끈한 쌍화차가 마시고 싶었다면서 엄지를 치켜든다.
“육아휴식엔 힐링 차가 딱이죠.”
그렇게 귀하게 얻은 자유시간에 할일도 많을텐데 모든걸 접어두고 엄마아빠와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해주는 딸이 사랑스러웠다.
눈도 자주 내리고 강추위가 계속되고 있어서 그런지 나 역시 한방 차가 간절했다.전통 한과를 다양하게 맛볼 수 있는 티 푸드 맛집 차도원 마당은 고즈넉했다. 소나무는 진눈깨비를 맞아 상고대가 되었고 마당 한편의 항아리 위에도 말간 진눈깨비가 쌓여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차에서 내리다 발이 미끄러졌다. 차 문을 잡고 있어서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것만은 면했지만,허리가 삐긋 했다. 진땀이 났다. 진눈깨비가 덮여있는 마당은 지층이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겉 다르고 속다른 마당이었다.
강추위가 머무는 겨울엔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밤새 진눈깨비가 그대로 얼어붙을까 조바심이 났다. 요즘은 너나없이 운전을 하고 있어서 블랙아이스가 생성되는 이런 날씨가 지례 무섭고 걱정되었다.
빙판 위를 조심조심 걸어서 왼쪽 입구의 나무계단을 지나쳐 오른쪽 돌계단으로 올라갔다. 마당과 달리 미끄럽지 않았다. 다행히 허리도 괜찮은것 같았다.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는 팽주님과 새해 인사를 나눴다. 벽난로가 있어서 차방은 따스했다. 어디선가 은은하게 풍겨오는 기분 좋은 한약재 향기에 심호흡을 했다. 따스한 수분이 품고 있는 한방약재의 향기로 코가 뻥 뚫리며 시원해졌다.
벽난로 위로 다가갔더니 팽주님이 뚜껑을 열어 보여주셨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들통 안에서 한약재가 달여지고 있었다. 벌써 2일째 달이고 있다는 쌍화차는 탕색이 매우 진했다. 대추차도 쌍화차도 한방차도 이렇게 직접 달이고 있어서 차방은 항상 약재향기로 그득하다. 냄새만 맡아도 보약을 먹은 듯 몸이 편안하다.
손맛이 뛰어나고 재주가 많은 박소영 팽주님은 도예가문의 딸이다. 왕실도자기초대명장인 박부원 선생을 아버지로 둔 덕분에 도원요의 큰 행사인 박부원도예가의 특별 초대전시회가 있을 때마다 큐레이터로 혹은총괄 기획자로 활약을 한다.
지난해 12월 한 달간 밀알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열렸을 때 브런치에 소개도 하고 전시회장에도 다녀왔다.
딸이 쌍화차를 골라서 나는 대추차를 주문하고 짝꿍은 한방차를 주문했다. 가족이지만 성격도 개성도 참 다르다.
자연스럽게 초대전에 관한 뒷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의 달항아리를 유심히 지켜보던 기업의 대표가 초대전에 몇 차례 방문해서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누곤 두 점을 구입했다고 한다. 십여 년 전부터 달항아리를 감상하다가 처음 구입하게 되었다고. 참 흐뭇한 소식이었다. 작품을 알아보고 소장하기로 한 기업가의 안목도 귀하고 흙을 빚고 구워내는 일에 생애를 바친 예술가의 열정도 귀하다. 전시회에서 보았던 작품은 따로 전시중이라 차방에선 볼 수 없었다.
문득 짝꿍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달항아리가 기억났다. 전시회장에서도 가장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작품이었다. 푸른 빛깔의 달항아리는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우주와 천체를 연상케 했다. 항아리 내부는 붉은 빛이었는데, 내부에도 형언할 수 없는 빛의 스펙트럼이 그라데이션으로 입혀져 있었다. 불의 혀가 핥고 넘어 다니면서 고온에 흙과 유약이 반응하면서 만들어지는 빛의 예술이었다. 색감이 오묘하고 신비로워서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었으나 눈으로 보는 것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찍는 사람의 기술 부족이었다.
다관에 옮겨진 채 끓고 있는 쌍화차를 받은 딸이 향기를 흡입하면서 와아! 하고 감탄했다. 나도 대추 고를 풀어놓은 듯 진한 차를 받았다. 짝꿍이 받은 것은 한방차인데, 백자 다관에 담겨 나왔다. 분잔을 청해 나눠 마실 만큼 양이 충분했다. 한 잔의 차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입맛을 다셨다. 마음을 녹이고 품어주는 깊은 정이 느껴지는 한약재의 맛. 피로가 쌓이고 혓바늘이 돋을 때면 그리워지는 바로 그 맛이었다.
지난해에 건강이 좋지 않았던 팽주님이 편안해 보였다. 한방차를 달이면서 조금씩 맛을 보는 것 밖에는 차이가 없는데,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높았던 간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혈압도 정상으로 회복되었단다. 약차를 달이면서 맛 보는 정도로도 회복이 되었다니 한방차의 민간요법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병에 걸리는 사람은 많지만 호전되었다는 소식은 듣기 어렵다.문명의 병이라 일컫는 성인병의 특징이다
쌍화차와 대추차의 효능
쌍화차는 과도한 노동이나 감기와 같은 질병으로 체력이 저하되었을 때 기력을 올려주기 위한 약 처방이다. 동의보감에도 기록되어 있는 쌍화탕은 피로 회복이나 기력 회복을 위해 백작약, 숙지황, 황기, 당귀, 천궁, 계피 등의 약재를 달여 만든 한약이다. 이러한 쌍화탕을 처방 없이 손쉽게 만들어 근접한 효과를 얻는 민간 음료가 쌍화차다. 성분이 따스하여 감기 초기에 한기를 느낄 때 효과가 좋다. 다른 본초수와 마찬가지로 면역력을 높이는 데 좋다고 알려져 있는 쌍화차의 대표적인 효능으로는 항염증 작용을 들 수 있다. 또한 여성의 자궁을 건강하게 해주며, 노화를 방지하고, 혈액을 보충하여 폐경기 증상에 도움이 된다.
옛말에 ‘대추를 보고 먹지 않으면 늙는다’ 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우리 조상들은 대추를 즐겨 섭취했다. 영양이 풍부한 대추는 수면과 휴식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 말려둔 열매를 달여서 씨와 껍질을 걸러낸 대추차는 빠르게 당을 보충하여 에너지원으로 쓰인다. 섬유질이 풍부한 대추는 소화기능을 개선하며 위장의 팽만감, 가스 변비와 같은 증상을 완화하는 데도 사용된다. 대추는 면역강화제로도 효능이 좋다.
독이 없는 한약재를 달여 속을 편안하게 하고 피로감을 완화시켜주는 한방차의 맛은 쌍화차보다 순하고 후미가 깔끔했다. 짧은 시간 벽난로에서 끓는 약재 향기를 맡으면서 보약을 먹었더니 세상 넉넉해지는 마음이었다. 셀프촬영한 사진을 가족 카톡에 올렸더니 바로 태국에 있는 아들이 답글을 달았다. 아들도 쌍화차를 알아차렸다. 자녀들이 성인이 되면 원 가족이 함께 모일 기회가 점점 줄어든다. 그런 의미에서 랜선으로 가족모임에 참여해준 아들에게도 고맙다. 나와 달리 평소 마주칠 시간이 거의 없는 짝꿍이 애교쟁이 딸라미 덕분에 흐믓한 시간을 보냈다.
티푸드는 참을 수 없다며 딸이 군밤과 곶감 말이를 주문했다. 팽주님이 맛보라고 내주신 한입 군고구마까지 먹었더니 저녁식사 생각은 달아나버렸다. 배도 부르지만 마음이 더 부요해진 느낌, 거기에 더하여 피로가 풀리고 건강해진 느낌이었다.
오전엔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들었고, 오후엔 딸과 단란한 데이트로 보약과 후식까지 충족했으니 이대로 한 시간 정도 운동만 하면 건전하게 주일을 마무리 하겠다 싶었다. 쓰고 싶은 글도 있고, 시작해 놓은 글도 있어서 작업에 마음이 쏠리기도 했지만, 앉으면 집중해서 대여섯 시간이 순삭 되기 일쑤라, 몸에 고인 에너지를 발산해야 했다. 걷는 걸 어지간히 좋아하지만 진눈개비가 내려서 눈썰매장이 된 산책로는 너무 위험했다.
딸을 집에 데려다주고 골린이인 내가 30년 경력의 싱글 골퍼 짝꿍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법이었다. 귀엽다는 듯 기꺼이 내 청을 들어준 덕분에 스크린골프샵에 가서 18홀 골프를 쳤다. 코스와 그린 난이도를 4.5로 맞췄는데, 전장이 길어서 드라이브 거리가 고작 140~160밖에 안되는 나에겐 힘든 코스가 많았다. 게다가 그린의 라이도 너무 어려웠다. 보기 플레이어인 나는 파로 끝난 홀도 있지만 퍼터를 세 번 친 홀도 있었다. 드라이버도 정타를 맞추지 못하고, 유틸리티도 거리가 시원찮았다. 페어웨이가 그렇게 넓은데도 꼭 러프에 빠지는게 문제였다.
더 큰 문제는 후반에 들어가서 파3홀에서 더블파를 했다. 결국 91개, 19오버파를 기록했다. 나와 달리 짝꿍은 싱글 골퍼답게 파가 수두룩하고 버디도 두 개나 잡았다. 하지만 짝꿍의 스코어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코스 난이도가 높아서 장타인 그의 볼이 오비를 냈기 때문이었다. 또 그린이 어렵다는 건 싱글 골퍼에게도 난공불락인 모양이었다. 짝꿍의 스코어는 81개, 9오버파를 기록했다. 혼잣말이 나왔다.
‘쩝! 기회를 놓쳤네. 핸디 받고 쳤으면 내가 이긴 게임인데!’
짝꿍이 빙긋 웃었다. 너무 같잖게 여기는 것 같아 약이 바짝 올랐지만,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걷지도 않고 실내에서 18홀을 쳤을 뿐인데 다리에 힘이 풀렸다. 겨울의 중심에 들어서면 항상 느낀다. 마음껏 산책을 할 수 있는 계절이 정말 좋다는 걸. 체력을 유지하기엔 걷는 것만큼 좋은 운동도 없다는 걸. 마음을 다스리기에도 산책이 그만이라는 걸.
봄이 정말 그립다. 1월 초순이니 아직도 두달은 꼬박 지나야 봄바람이 찾아올 것이다. 본초수를 챙겨먹으며 체력이나 키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