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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링가객 Feb 23. 2024

웃음 센서

설 명절 단상

 가족이 모이는 명절엔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바쁜 일상을 멈추고 오랜만에 친족의 정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풍성하게 차려진 명절 음식을 나눠먹으며 명절 덕담을 나누고 서로를 축복하는 전통은 민속명절을 두어 기념하던 조상의 유산이다.


 민속명절 기간에는 국가에서 고속도로 이용료를 면제해준다. 직종에 따라 휴가를 쓸 수 있는 기간이 다르지만 대다수의 국민은 막히는 길을 뜷고 고향을 찾아가 가족친지와 함께 차례를 지낸다. 연휴가 길면 긴대로 짧으면 짧은대로 명절 기간에는 밤이 늦도록 도로가 막힌다.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말이 실감 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의 민속명절 풍경은 사실 많이 달라졌다. 세트로 주문해간 제사음식을 여행 중 온라인으로 진행한다는 뉴스도 새롭지 않을만큼. 그 이면에는 찾아갈 고향이 없어 몇 배로 고독한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상당하며, 이런 이들을 위한 관광 및 유흥 상품들이 활발하게 개발되어 명절 특수를 노린다.




 맏며느리의 역할은 변함이 없다. 명절휴가에 맞춰 어머님과 남편 형제의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기도 했지만 올해는고금리에 얇아진 지갑을 현명하게 운영하자고 마음을 다잡으며 명절을 맞았다. 코로나 데믹을 헤쳐나가기 위해 풀었던 시장의 유동성은 피할 수 없는 인플레이션의 고통으로 돌아오고 있다. 체감되는 물가는 생각보다 위협적이다.



 예전같으면 서로 작은 선물이라도 챙기며 명절을 축복하던 지인들이 조용하다. 소소한 만남으로 주고받던 따스한 메시지들도 조용하다. SNS로 선물을 주고받던 수년간의 유행 역시 잠잠하다. 정이 마른 것이 아니라 형편에 여유가 사라진 건 아닐까 싶다.


 세뱃돈과 부모님께 드릴 용돈 봉투를 준비하면서 그 어느때보다 마음이 쓰였다. 형편껏 할 수밖에 없지만 마음만큼 채워넣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위축되는 심리. 어쩔 수 없이 껴안아야할 마음의 몫이다. 중년이 감당할 몫은 손 위로도 까마득하고 손 아래로도 까마득하다.




 장을 보러 갔다. 싱싱한 야채와 명절요리 재료들을 구입할 생각에 마음은 한껏 부풀었다. 메모한 스마트폰을 들고 커다란 마트를 한 바퀴 돌았다. 한웅큼에 잡히는 쪽파 한 단에 8400원, 애호박 1개 3900원, 시금치 100g에 2800원, 양배추 6900원 바나나 소포장 7900원. ..


순간 따스한 열정으로 빛나던 눈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설레던 명절 기분이 찬물을 뒤집어쓴 듯 냉랭해졌다. 지나가는 모녀 중 엄마가 말했다.


  "세상에나 명절이라고 채소값이 뺨을 치네. 대체 뭘 산다니?"


 그러고보니 명절 차례상에 쓰이는 식재료들은 인정사정 없는 가격이 붙어있었다. 진짜로 뺨을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고 마음까지 움츠러들었다.


 한바퀴 둘러보고 물건 좋고 값도 좋은 제주산 세척무를 담고 소포장 해놓은 버섯들을 종류별로 담았다. 한겨울이니 그럴만도 하지만 봉지 안에 들어있는 버섯 알은 줄었고 가격은 2배 정도 올라 있었다. 한 봉지에 6000원이 붙은 양송이 버섯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양을 봐선 한봉지 더 담고 싶었으나 시린 손을 주머니에 넣고 지나갔다. 비싼 시금치 대신 봄동을 담았다. 100g에 690원. 노란 속잎이 꽃처럼 가지런한 봄동 두 포기를 담았더니 4천원이 넘었다. 인기 없는 길죽한 우엉도 담았다. 봄동의 고소함과 우엉향기를 생각하자 기분이 즐거워졌다.


 감자와 당근을 훑어보는데 눈길이 느껴졌다. 둘러보니 나와 대각선 위치에 중년 남자가 직원조끼를 고 서있었다. 손으로는 야채를 소분하여 포장하면서 내가 서있는 쪽을 힐끗 또 힐끗 보는 거였다. 시선의 종착지점이 내 뒤쪽인 것을 확인하고 지나쳤다.

 

 시장을 돌다보니 아까 그 자리에 왔다. 시금치를 포기했지만 아직 쪽파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준비하려는 음식들을 떠올리자 쪽파가 꼭 필요한 건 아니었다. 한 단에 6900원 하는 대파를 고르고 있는데 옆에서 시금치를 담는 노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풍채가 좋은 노인은 봉지에 시금치를 담으면서 끝이 잘린 잎은 떼고 흙을 터는 일에 몰입하고 있었다. 봉지는 이미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까 그 직원이 이쪽을 보는 것이 느껴졌다. 표정에 짜증이 배어있었다. 노인이 시금치를 다듬어서 담고 있는 모습이 눈에 거슬리는것 같았다. 아까부터 노인을 보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직원이 노인을 향해 소리쳤다. 


  "으르신, 시금치 엔간히 담으셔어. 잔뜩 담아와선 비싸다고 쏟아놓고 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여어."


 충고를 듣고 주변을 둘러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듣지 못한 듯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만큼 봉지를 채운 뒤에야 카트에 옮겨담고 생선코너로 갔다. 직원은 다른 일을 하기 위해 자리를 떠나 있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쓰여 노인을 보았다.


  생선코너에서 봉지를 들고 오는 여자가 노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꼭 닮은 이미지로 보아 노인의 딸인 것 같았다. 노인의 카트로 다가간 여자가 카트에서 가격표가 붙어있지 않은 시금치봉지를 들고 아까 그 직원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시금치를 계량한 직원이 가격표를 붙이자 여자의 눈이 커졌다. 시금치를 들고 노인에게 다가간 여자가 가격표를 보여주자 노인이 절룩거리며 직원에게 시금치 봉지를 들고 다가갔다.


이크, 소동이 일겠군.


명절 전에 불쾌한 시비가 일어나는 현장을 보고싶진 않았다. 나는 재빨리 다음 칸으로 갔다. 개의 샵을 붙여놓고 통로를 열어놓은 것처럼 구성되어있는 대형마트였다. 자연식재료관 옆에 가공식품관이 있고, 그 다음 생필품관 옆공산품이 있는데, 모든 필요를 한 곳에서 충족할 수 있어 지역민들이 몰렸다.


 카트를 밀고 다니는 사람들은 대게 추위로 푸르뎅뎅한 얼굴이었다. 웃음이 없는 시장, 잘 차려진 어마어마한 규모의 '올푸드마켓'은 냉동창고 같았다.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냉랭한 분위기와 직원의 안보는듯 지켜보던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깊게 남았다.


 명절에 웃는 사람은 누구일까? 웃고 싶었다. 하지만 마트에 있는 동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장을 다 보고 나올 때까지 커플이나 가족이 함께 장보는 이들을 지나쳤지만 웃는 사람이 없었다. 웃음센서가 단체로 고장이라도 났단 말인가?




 장을 보고 나오는데 으슬으슬 한기가 드는 걸 느꼈다. 그 땐 알지 못했다. 명절기간이 어떻게 지나갈지. 얼마나 호된 몸살을 앓게 될지. 그 와중에 몇 건의 장례식을 찾아가게 될 것인지도. (봄까지 멀지 않았는데, 올해 명절 전후로 명을 다하신 분들이 유독 많았다.)



 존재의 안정감이란 책임감의 무게만큼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무거운 존재감이라니, 그래서 중년은 먹먹하고 고독한 시기이다. 모두를 잘 챙기기 위해 나 자신도 열심히 챙겨야 한다.


  시절이 어렵다고 해도 사랑하는 일을 멈출 수는 없는 법이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사랑할 수 있음을 증명할 때이므로. 사랑이 아니라면 살아가는 일도 심혈을 기울여 이루려는 그 무엇도 사실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 사랑은 때로는 책임감이 되기도 하고 의무감이 되기도 한다.


 웃음센서를 잃어버린 채 두 주일이 지나가고 써둔 글을 올린다. 기록이란 것이 살아간 흔적이고 증거이므로. 기록하지 않으면 현기증 나게 사라져버리는 날들을 구원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웃음은 잠과 함께 건강을 지키는 명약이라고 한다. 웃음에 대한 철학적 연구나 의학적 연구가 아니라도 웃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치명적인 질환이다. 크게 웃기만 해도 가슴에 고여 영혼을 짓누르는 체증이 사라진다. 여성들이 정신병원에 가지 않고도 무사할 수 있는 것은 수다를 떨면서 웃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돌아보니 분주한 날들 속에도 맏며느리 역할을 무사히 치렀다. 연로한 부모님을 뵈면 슬픔의 잔상이 깊지만, 급변하는 거친 세월을 묵묵히 버티며 오늘까지 아름다운 생을 영위해오신 것에 말로 다 할 수 없이 감사하다. 그래서 폐를 열고 심호흡을 하고 미소를 떠올린다.


 이제 웃음 센서를 손봐야겠다. 글이 살아온 날들의 기록과 성찰이라면, 웃음은 내 삶의 방향에 대한 긍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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