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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러닝 Feb 05. 2022

함흥차사

우리말 유래(어원)

함흥차사(咸興差使)

(명사) 심부름을 가서 오지 아니하거나 늦게 온 사람을 이르는 말.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에 있을 때에, 태종이 보낸 차사를 죽이고 혹은 잡아 가두어 돌려보내지 아니하였던 데서 유래한다.  


(예문)

그가 올 때가 지났는데 아직도 함흥차사이다.

심부름을 보낸 지가 언젠데 아직도 함흥차사란 말인가.


(유래)

생성시기: 조선, 1806년(순조 6년)

1398년 태조의 와병 중에 아들 방원은 사병을 동원해 세자 방석, 왕자 방번을 죽였다. 새 세자는 방원의 청으로 방과로 결정했다. 태조는 왕자들이 죽은 데 대해서 몹시 상심했다. 그는 곧 왕위를 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00년(정종 2년)에는 방원이 세제가 되었다가 곧 왕위에 오르자 정종은 상왕이 되고 태조는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을 미워해서 서울을 떠나 소요산(逍遙山)과 함주(咸州, 지금의 함흥) 등지에 머물렀다. 특히 함주에 있을 때 태종이 문안사(問安使)를 보내면, 그때마다 그 차사(差使)를 죽여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디에 가서 소식이 없을 경우에 일컫는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태조의 태종에 대한 증오심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태조는 태종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1402년(태종 2년) 12월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는 조선 후기의 학자 연려실 이긍익(1736∼1806년)이 지은 조선시대 야사총서(野史叢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나온다. 이 책은 저자가 부친의 유배지인 신지도(薪智島)에서 42세 때부터 저술하기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약 30년 동안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어휘가 처음 사용된 때는 태종 2년인 1402년으로 볼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야사란 점으로 미루어보아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함흥차사’의 생성 시기를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이 완성된 1806년으로 잡는 게 옳을 것 같다. (출처 우리말 어원 500가지, 2012년, 이재운, 박숙희, 유동숙)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우리말샘]


#함흥차사 #우리말 #유래 #인생러닝 #한국어 #한국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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