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두고 쉬는 게 어때요?
아파서 쉬는 거니까 실업급여 받게 해줄게요.”
스물여덟, 첫 유방암 수술을 하고 일주일 만에 출근했을 때 팀장님이 건넨 말이다.
잔뜩 쌓인 서류를 울며 겨자 먹기로 처리하며 소화도 못 한 채 버티고 있던 나에게,
그는 쉬어도 된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억울했다.
큰 수술을 하고도 책임을 다하겠다고 출근했는데,
퇴사를 권유받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못 한다고 말하지 못한 채 몇 년을 더 버텼다.
그리고 퇴사할 때도 그랬다.
버티다 버티다 그만두라는, 지금 남편의 말에 일을 내려놓았지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세 달도 채 쉬지 못하고 다시 취직했다.
상황이 바뀌고, 내 재능을 알아봐 주는 곳이라면
이전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두 시간 걸리던 출퇴근을 한 시간도 채 안 걸리는 구조로 바꾸는 시도도 해 보았으니까.
하지만 스스로 바로잡아야 할 본질이 바뀌지 않으면
상황이 바뀌고 사람이 바뀐들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야 깨달았다.
살아남기 위해 달리며 열심히 산다고 믿었지만,
어딘가에서 사무치게 올라오는 외로움과 공허함은
어느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즐겁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간다지만,
나에게 삶은 즐겁지 않았다.
술 한잔에 흘려보낸 하루도 돌아서면 다시 제자리였고,
나는 다람쥐 쳇바퀴를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된 출퇴근과 업무 스트레스,
집에 오면 다시 시작되는 긴장과 피로.
나는 그 모든 것을 술로 풀었고,
다음 날 아침이면 스스로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보지도 못했다.
나는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예쁘다고 말해준 적이 없었다.
내가 나를 예쁘다 말해주지 않는데
누가 나를 예쁘다 할 수 있겠는가.
“엄마, 나 예쁘지?”
“예쁘지. 내 딸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열세 살 딸은 자주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칭찬하는 법을 나에게 가르쳐 준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사람은
무언가를 잘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빛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제,
존재의 가치로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