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by 역전의기량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쪽에는 노트북과 전표를,
다른 한쪽에는 두꺼운 세무회계 책을 들고 퇴근하던 날들이 있었다.
스물두 살쯤이었나. 정확히는 기억이 가물하지만
강남에서 인천으로 야간대학을 다니던 시절이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했지만,
현실의 회계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실력을 채우려면 공부가 필요하다고 믿었고,
그렇다고 생계를 포기할 순 없어서
‘일하며 공부’라는 선택을 했다.

그래서 나는
두 시간 가까운 이동시간 동안
두 어깨에 무거운 짐을 얹고
일과 공부를 병행했다.





열심히, 죽어라 했는데도
주중엔 낮에 일하고 밤엔 수업을 듣고,
주말엔 마감 때문에 못다 한 일을 집에서 마무리해야 했다.
주말이 지나 월요일이 오면
또 그 무거운 짐을 들고 만원 지하철을 탔다.

하지만 내 노력과는 별개로,
하나라도 틀리는 날이면
그걸 수정하느라 애쓴 시간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곤 했다.





이후 회사를 옮겨도 이동시간은 비슷했다.
혹시라도 놓치면 안 되는 것들을
주섬주섬 챙겨 넣다 보면
가방은 늘 무거워졌다.





시간이 흘러,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운동을 시작하고
바디프로필을 준비할 때도 비슷했다.
점심에 먹을 닭가슴살,
운동 후 먹을 저녁,
운동복,
갈아입을 속옷.
그것들만 넣어도 가방은 금세 꽉 찼다.

거리가 가까운 곳으로 출근하는데도
자꾸 숨이 찼던 건
내 체력 때문만이 아니라
가방의 무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얼마 전에 깨달았다.

저녁은 집에 가서 먹어도 된다.
샤워는 매일 헬스장에서 하지 않아도 된다.
헬스장은 집이 아니니까,
모든 걸 ‘출근 가방’에 넣고 다닐 필요도 없다.






가방을 비우면 뭔가 큰일이 날 것 같았는데
한번 비워 보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몸이 1년 전과 다르게 또 바뀌어
그저 비워 봤을 뿐인데,
몸가짐이 가벼워지더라.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책임감도
가방의 무게와 함께
조금씩 내려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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