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서브스턴스

'나다움'은 잃어버렸던 시간들

by 해루아 healua

작년 한 해, 나에게 가장 충격적인 잔상을 남긴 영화를 꼽으라면 단연 <서브스턴스>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기괴한 신체 변형과 인물의 감정 변화의 잔상은 일주일 내내 나를 괴롭혔다. 한때 최고의 스타였던 '엘리자베스(데미 무어)'가 50세 생일에 방송국에서 해고를 당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평생을 '아름다움'이라는 자본으로 살아온 그녀에게 노화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파산 선고였다. 절망에 빠진 그녀 앞에 기묘한 약물, ‘서브스턴스’가 나타난다.

KakaoTalk_20260224_170347513.png 영화<서브스턴스>의 엘리자베스
KakaoTalk_20260224_170400636.png 영화<서브스턴스>의 수

자신이 다시 젊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약물을 주입하자, 엘리자베스는 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는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의 등을 찢고 완벽하고 치명적인 자아인 ‘수(마거릿 퀄리)’가 태어난다. '수'는 늙고 주름진 엘리자베스와는 정반대의 존재다. 팽팽한 피부, 결점 없는 몸매, 대중의 시선을 단숨에 앗아가는 젊음. 수는 엘리자베스의 분신이자 또 다른 자아지만, 대중은 오직 '수'에게만 환호한다. 엘리자베스가 평생을 바쳐 일구어온 커리어와 명성은 이제 '수'라는 젊은 껍데기가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KakaoTalk_20260224_170416737.png 영화<서브스턴스>의 엘리자베스
KakaoTalk_20260224_170426579.png 영화<서브스턴스>의 엘리자베스

하지만 이 마법 같은 변신에는 잔혹한 규칙이 있었다.

7일마다 본체와 복제된 자아가 의식을 교체해야 하며, 무엇보다 ‘둘은 결국 하나’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나 욕망에 눈이 먼 수는 점점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갈망하기 시작한다. 더 오래 박수받고 싶고, 더 오래 빛나고 싶었던 수는 규칙을 어기고 엘리자베스의 생명력을 착취한다. 수가 화려하게 빛날수록 잠든 엘리자베스의 몸은 기괴하게 부패하고 추해진다. 결국 서로를 증오하게 된 두 자아는 충돌하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해괴망측한 괴물이 되어 파멸에 이른다.


영화 속 외모 지상주의를 풍자한 대사들은 노골적이었다.


“여자 나이 쉰이면 끝난 거야.”

“저런 코를 달고 있을 바엔 그 자리에 가슴이 달린 게 낫겠다.”


스크린 너머로 보이는 뒤틀린 현실에 눈을 질끈 감으면서도, 한편으론 이상하게 속이 시원했다. 내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미(美)에 대한 뒤틀린 집착과 사회의 시선을 이토록 잔인하게 긁어준 영화가 있었던가.


영화는 묻는다.

"우리는 정말 무엇을 위해 그토록 스스로를 깎아내고 있는가."


실제로 데미 무어의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소감은 매우 인상 깊었다.

“우리가 스스로를 충분히 똑똑하지 않다고, 예쁘지 않고 날씬하지 않다고,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비교의 잣대를 내려놓는 순간, 당신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됩니다.”


서브스턴스(Substance)는 '본질', '실체'라는 뜻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 인물들은 본질을 지키기 위해 본질을 버리는 선택을 한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그 안에 들어있는 진실된 생명력을 탕진한다.


기술이 발전하고 삶의 질이 올라갈수록, 수명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갈망은 더 커진다. 남보다 더 날씬해야 하고, 더 젊어 보여야 하며, 타인의 미적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추기 위해 스스로의 본질을 갉아먹는다. 진정한 나를 사랑하는 법을 잊은 채, 남들에게 보여줄 ‘수’라는 껍데기에만 모든 생기에너지를 쏟아붓는 것이다.



성형 대국이라 불리는 한국의 현실은 이 기괴한 영화 속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 역시 그 숨 막히는 흐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한국 사회에서 나는 늘 외적인 결함을 안고 사는 ‘부족한 존재’였다. 잡지 속 야리야리한 모델의 몸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배꼽티나 비키니는 오직 ‘자격이 검증된’ 날씬한 이들의 전유물이라 믿었다. 만약 그렇지 못한 몸으로 그 옷을 입는다면, 주위의 수군거림과 날 선 시선이 화살처럼 등에와 박혔다. 때로는 해외의 노골적인 인종 차별보다, 내 나라에서 겪는 은밀하고도 각박한 외모 차별이 훨씬 더 견디기 힘든 갈고리가 되어 나를 끌어내렸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은 피할 곳 없는 거울의 방이었고, 나는 그 거울 속에서 끊임없이 일그러진 나를 마주해야 했다.


나는 해외여행을 떠날 때마다 묘한 해방감을 탐닉했다. 나시와 배꼽티, 비키니와 짧은 바지... 한국에서는 '검열'의 대상이었던 옷들이 그곳에서는 비로소 한 개인의 '개성'으로 존중받았다. 그곳의 거리에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몸을 웅크린 이들이 없었다. 풍만한 몸을 가진 이들도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냈고, 그 자신감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기는 그 어떤 정형화된 미(美) 보다 아름다웠다. 타인의 눈치가 아닌, 오직 자신의 만족을 위해 옷을 입는 그 광경 속에서 나는 비로소 깊은숨을 들이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해방의 시간은 짧았다. 여행 가방을 풀고 다시 한국 땅을 밟는 순간, 마법은 풀리고 현실의 중력이 나를 짓눌렀다. 다시 타인의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추기 위해 ‘서브스턴스’를 갈망하는 엘리자베스로 돌아왔다. 화려한 이국땅에서 잠시 깨어났던 나의 '나다움'은 캐리어 깊숙이 처박혔고, 다시 거울 앞에서 스스로를 검열하며 완벽한 껍데기만을 꿈꾸기 시작했다.




사실 '아름다움'의 어원은 ‘나답다’는 뜻의 ‘아름’에서 왔다고 한다. 우리가 산과 들, 바다를 보고 감탄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연(自然)'스럽기 때문이다. 자연스럽다의 '자연'은 '스스로(自) 그러하다(然)'는 뜻이다. 산은 신답고, 바람은 바람답게 인위적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흘러가는 상태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토록 나를 지워가며 타인의 눈에 비친 ‘나’를 성형하고 다듬는 데 평생을 바치는 걸까. 언제부터인가 남들이 원하는 욕망을 내가 진짜 원하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본질을 외면한 채 얻어낸 박수갈채는 결국 나를 갉아먹는 '독'이 된다. 영화 속 '수'가 엘리자베스의 생기를 뺏어 쓸 때마다 본체가 썩어갔듯, 우리 역시 타인의 인정을 위해 나다움을 포기할 때마다 내면의 자아는 부패해 간다.


이제 나는 나를 감싸고 있던 화려한 포장지를 뜯어내고, 무대 뒤 가려진 커튼 너머의 진실을 말하려 한다. 나는 누군가의 숨겨진 매력을 찾아내 빛나게 해주는 일이 진심으로 좋았다. 그래서 난 화장품 뷰티 업계에서 커리어를 쌓아왔다.


언제나 타인의 아름다움과 가능성을 이끌어내는 현장의 중심에는 내가 있었다. 타인의 단점을 섬세하게 가려주고 장점을 극대화해 그들이 환하게 웃는 얼굴을 마주할 때면, 비로소 나의 쓸모를 인정받는 듯한 깊은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정작 남의 단점은 너그럽게 가려주면서도, 과거 나의 71kg 시절은 단 한 번도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했다.


과거의 나는 피팅룸 안에서 조명이 유독 잔인하다고 느꼈던 날이 있었다. 거울 속 몸을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옷을 벗지도 못한 채 커튼을 젖히고 나왔던 순간이 생각난다.


“살 좀 빼면 예쁠 텐데...”


아무렇지 않게 던져진 그 말 한마디는, 하루를 통째로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 문장을 사실처럼 받아들였다. 예뻐지기 전까지는, 나는 미완성이라고.


이제 나는 그 기록을 시작하려 한다.

이번에는 나를 고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나를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안아주기 위해서.

71kg의 나에게, 이제야 조금 늦은 사과를 건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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