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라진 세상에서 깊어지지 못한 마음에 대하여
나는 89년생이다. 흙먼지 날리는 바닥에 금을 긋고 '땅따먹기'를 하던 세대이자, 손가락 하나로 전 세계의 정보를 낚아채는 디지털의 정점을 동시에 살고 있는 후기 밀레니얼이다. 땅바닥 위에서 영토를 넓히던 정직한 성취감과, 클릭 한 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극강의 효율 사이를 관통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릴 적 나의 놀이터는 스마트폰 액정이 아니라 투박한 일상 그 자체였다. 종이 인형의 얇은 목이 꺾일까 조심스레 가위질을 하고, 손바닥이 빨개지도록 공기를 던지며 숫자를 세고, 학종이를 따기 위해 입술을 바짝 붙이고 숨을 참던 시절. 다마고찌 속 가상 동물이 배고프다고 울어대면 수업 시간에도 몰래 버튼을 누르며 묘한 책임감을 배우고, 지우개 따먹기와 포켓몬 딱지에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던 그때, 우리의 행복 허들은 그리 높지 않았다. 물리적이고 단순한 놀이들이 우리를 채웠고, 나는 부족함 속에서도 충분히 즐거웠다. 그 시절의 즐거움은 언제나 '몸'을 움직여야 얻을 수 있는 정직한 결과물이었다.
얼마 전 단짝 친구와 길을 걷다 나눈 대화는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시대의 기묘한 속도감을 다시금 일깨워 주었다.
"야, 기억나? 우리 옛날에 드라마랑 뮤직뱅크 본방 사수하려고 학교 종 치자마자 진짜 미친 듯이 뛰어왔잖아. 특히 너, 좋아하는 조성모 나올 때 다시 보겠다고 공테이프 끼워놓고 녹화 버튼 위에 손가락 올린 채 대기하던 거 말이야. 행여나 광고까지 녹화될까 봐 리모컨 꽉 쥐고 화면만 뚫어지게 보던 그 간절함, 요즘 애들은 절대 모를걸."
친구의 말에 참았던 웃음이 터졌다. 그랬다. 우리에게 '기다림'은 지루한 인내가 아니라 당연한 일상이었다. 비디오테이프가 끝까지 돌아가면 '위이잉' 소리를 내며 한참 동안 태엽을 감던 그 막막한 되감기의 시간조차 우리에겐 설렘의 일부였다. 고등학교 시절, MP3에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만을 추리고 추려 소중히 아껴 담았다.
하지만 그 시절 우리가 겪은 기다림이라는 결핍은 결코 고통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상을 향한 열망을 더 뜨겁게 지펴주는 장작과 같았다. 비디오가 다 되감아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혹은 다음 주 본방을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우리는 그 영화가 얼마나 재밌을지, 주인공은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 기다림의 공간 속에서 우리의 사유는 더 넓고 깊게 뻗어나갔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다림이 휘발된 시대다. 요즘 아이들에게 유튜브나 넷플릭스의 1.5배속, 혹은 2배속 재생은 선택이 아닌 기본값이다.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 탐닉하는 속도의 과잉. OTT 서비스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0.1초 만에 눈앞에 대령하고, 이제 더는 수고스럽게 프로그램 편성표를 뒤질 필요도 없다. 손가락 끝에 온 세상이 연결되어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조급해졌다.
결핍이 사라진 빈자리에 '조급함'이라는 괴물이 들어앉은 것이다. 조금이라도 멈추면 남들보다 뒤처질 것 같고, 배속을 높여 정보를 집어삼키지 않으면 손해 보는 것 같은 불안이 우리를 지배한다. 나는 친구에게 물었다.
"과연 요즘 친구들에게 기다림의 행복이라는 게 남아 있을까?"
비디오테이프가 되감기던 그 긴 시간은 영상을 보기 전 마음을 가다듬는 여백이었다. 일주일을 꼬박 기다려 만나는 본방송은 지루한 학교생활을 버티게 하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다. 결핍이 있었기에 대상의 소중함이 깨어났고, 기다림이 있었기에 그 끝에 마주한 만남이 찬란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해결되는 지금, 우리는 더 많이 소비하지만 더 빨리 공허해진다. 1.5배속으로 영화 한 편을 해치우고 나면, 머릿속엔 줄거리만 남고 감동은 휘발된다. 편리함이 커질수록 우리의 사유 근육은 비례해서 얕아지고 있었다.
기다리지 못하는 마음은, 깊어지지 못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너무 빨리 얻으려다, 정작 그것을 소화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법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흙바닥에 금을 긋던 그 느릿한 손길이 그리워지는 날이다.
세상은 점점 빨라지지만, 가끔 내 마음의 속도는 여전히 그 시절 비디오테이프가 되감기던 속도를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더 빨라졌지만,
더 깊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