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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을 듯 닿지 않은 마음

by 해루아 healua

"건강한데 뭐가 문제야?" 그 말 한마디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난임이라는 말을 '문제'라고 규정하는 그 시선에서, 마음의 골은 더 깊어지고 말았다.


엄마는 말하셨다.


"우리 땐 아이가 잘 생겨서 걱정이었는데, 요즘은 반대네."


엄마의 걱정보다, 지금 내 마음이 더 힘들다는 걸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웃고 말았다.


요즘 들어 친구들 사이에서 임신 소식을 전해올 때면, 축하의 말은 입에서 나갔지만 마음 어딘가는 선뜻 따르지 못했다.


"왜 나만 아닐까?"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그런 마음의 파도가 내 감정을 휩쓸고 가곤 했다. 그럴 땐 나도 모르게 초조해지고, 불안해졌다.


나는 아이를 늦게 낳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젊고 건강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조급해졌다. 체력도, 마음도.


희망은 있었다.


꿈속에서 바다 위로 백 마리의 돌고래가 힘차게 뛰어오르고, 돌아가시지 전 친할머니가 내 태몽을 꾸었다는 말을 아빠에게 들었을 때, 왠지 이번엔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 소식도 없었다.


기대하고, 실망하고, 또다시 기대했다가 좌절하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결국 마음속에는 말로 꺼내지 못한

무거운 감정들이 쌓여만 갔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챈 건 남편이었다. 어느 날, 풀이 죽어있는 나를 보고 남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젊은 나이가 있으니까... 자연스러운 거야. 그냥 그럴 수 있는 거라고, 너무 걱정하지 마."


그 말이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씁쓸했다. 30대가 되면 여성의 임식 성공률이 20대에 비해 절반 가까이 떨어진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걸 받아들이면서도, 마음은 그리 단단하지 못했다.




얼마 전엔 정말 기쁜 소식이 있었다.


20년 지기 친구가 수술을 이겨내고, 시험관 아기를 통해 한 번에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 그 친구는 자궁 근종으로 20cm나 되는 혹을 제거하는 힘든 과정을 겪었다. 그 모든 시간을 함께 지켜보았기에, 그녀의 임신 소식은 내 일처럼 기뻤다.


그 친구는 나에게도 인공수정을 권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자연 임신에 대한 작은 희망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 부부는 경주에 있는 유명한 한의원에 예약을 잡았다. 당일치기 기차를 타고 긴 여행을 떠났다.


"그래, 이번이 마지막 보루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떠난 길이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서글펐다.


검진을 마친 후, 나는 경주에서 유명한 닭강정을 사서 기차 안에서 간단히 먹고 싶었다. 오랜만에 먼 길을 떠난 김에, 작은 위로라도 받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단호하게 말했다.


“기차 안에서 그런 거 포장하면 냄새나.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 주는 일이야. 그런 거 사는 거 아냐.”


그 순간, 나는 그 말이 서운했다.


내 기분이나 기대보단, 남들 눈치를 더 챙기는 것 같았다.


‘내 생각은 조금도 안 해주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툭 하고 내려앉았다.


게다가 내가 “내일 선거일인데, 하루 쉬는 것도 좋겠다” 하고 농담처럼 말을 건넸을 때, 남편은 "돈 더 벌지 뭐. 쉬어서 뭐 하겠어."


나도 모르게 쉬지 못한 남편의 걱정 섞인 말투로 이렇게 말을 했다.


"쉬는 날도 없는데, 쉬지. 난 자기 건강 챙겼으면 좋겠어. 일 중독도 아니고..."


남편은 갑자기 정색하며 말했다.


“내가 일 하고 싶어서 해? 돈 더 벌어야 여유롭지. 그런 말 하지 마.”


나는 그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 분명 장난 섞인 말이었는데, 남편은 진심으로 화가 난 듯 보였다. 서로의 온도 차가 컸다.


그렇게 우리는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감정은 삐걱거렸고, 나는 마음속으로 되뇔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말없이 나란히 기차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흐르는 경주의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내 마음은 이미 먼 곳에 가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표정은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혼잣말처럼 생각했다.


‘아기를 갖는다는 게 맞는 걸까. 지금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깜깜했던 기차 안에서 문득 예전에 다녔던 한의원 원장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요즘 부부들은 너무 빨리 이뤄내려는 것 같아요. 그냥 순리대로, 흐름에 맡기는 게 필요한데 말이죠.

아이를 갖는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과정이에요.


부부가 함께 지치고, 또 서로를 위로하면서 진짜 하나가 되어가는 시간이기도 하거든요.


그만큼 귀한 일이니까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해요.”


그 말이 유난히 가슴에 오래 머물렀다.

지금도 우리는, 몸도 마음도 하나가 되는 걸까. 아니, 우리는 그저 '아이를 갖기 위한 부부'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를 기다리느라, 정작 서로의 마음은 돌보지 못한 건 아닐까.


기대를 걸고 떠난 하루였지만, 마음 한구석엔 묘한 허전함이 남았다. 아이를 갖는다는 건, 단지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 둘의 마음이 함께 자라야 가능한 일이란 걸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니, 돌아오는 기차 안의 침묵이 더는 외롭지 않았다. 말없이 앉아 있던 그 시간이, 오히려 지금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조금씩 천천히, ‘하나’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기다림은 쉽지 않지만,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말보다 마음을 먼저 꺼내는 법을.

지적보다 위로를 먼저 건네는 법을.

혼자가 아닌, 둘로 살아가는 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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