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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강력한 신호

by 해루아 healua

결혼 후,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함께 살아가며 생활 습관의 차이로 남편과 자주 부딪혔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어느새 내 피부에 독처럼 번져나갔다.


한편으론 경력 단절에 대한 불안감이 마음속을 무겁게짓눌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던 그 시기, 나는 피부에 나타난 이상 반응을 마주했다. 결혼 전까지 피부과 한 번 가보지 않았던 내 턱에 화농성 여드름이 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늘 빠르게 해결하려 애쓰던 나는 이번만큼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싶었다.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 기울이기로 결심한 순간, 피부과 대신 한의원의 문을 두드렸다.


한의원에 들어선 첫날, 낯설지만 어딘가 따뜻한 분위기에 내 마음이 조금씩 풀어졌다. 잔잔하게 흐르는 클래식 음악과 은은한 약재 향기, 그리고 처음 만난 원장님의 다정한 말투는 그간 긴장으로 굳어 있던 내 몸과 마음을 서서히 이완시켰다.


첫 상담에서 체질 검사를 받았고, 결과는 ‘토양 체질’이었다. MBTI처럼, 나를 이해하는 데 큰 힌트가 되는 키워드였다.


토양 체질은 겉으로 보기엔 단단하고 안정적인 성향이지만, 욕심과 성급함이 지나치면 쉽게 탈이 나기 쉬운 체질이라고 했다. 꼭 지금의 내 모습 같았다.


그동안 무엇이든 완벽히 해내고 싶어 조급해하던 마음, 쉬어도 되는 상황에서도 죄책감을 느꼈던 시간들. 그 모든 것이 결국 몸을 통해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만난 원장님은 맥을 짚으며 조용히 물었다.


“잠은 푹 주무세요? 토양 체질은 욕심을 과하게 부리면 탈이 나요. 하지만 외양간을 잃기 전에 고치셨으니,정말 현명한 선택을 하신 거예요.”


이어서 원장님은 말을 덧붙였다.


“잠은 정말 중요해요. 몸의 균형을 회복하려면 잠부터 잘 자야 합니다.”


그날 이후, 원장님은 마치 엄마처럼 내 몸 상태를 세심히 살펴주셨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오늘 컨디션은 어때요? 지금 쉬면서 관리하는 거, 아주 잘한 선택이에요.”


“건강을 뒤로 빚지지 마세요.”




그러던 어느 날, 원장님은 자신의 레지던트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아이를 가지면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덜컥 임신을 하게 되었고, 주변의 눈치를 받으며 동료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괴로웠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그때 일을 중단하고 아이를 직접 키우며 사랑을 쏟았던 그 시간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지금은 모든 걸 다 이룰 수 있을 것처럼 보여도,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를 완벽하게 키울 수 있을까요?

뒤로 다 빚지는 겁니다.


지금 너무 잘하고 있어요. 건강도, 나 자신을 소중히 돌보는 게 먼저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참아왔던 눈물이 볼을 타고 계속 흘러내렸다.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아왔던 조급함과 불안까지 눈물에 실려 흘러내리는 듯했다.


그렇게 마음을 놓아주기 시작하자, 신기하게도 피부도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한약을 복용하며 몸을 다스리고, 조급함이 아닌 기다림으로 바꾸자 예민하고 붉게 달아올랐던 피부가 어느새 진정되며, 건강을 되찾아갔다.


몸이 먼저 말을 걸었고, 마음이 그에 응답하자 비로소 나라는 존재 전체가 회복되어 가는 듯했다.


이런 말들은 어찌 보면 뻔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다 보면, 뻔한 말들이 오히려 가장 본질적인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소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 태도. 내 몸의 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귀 기울이는 습관. 그리고, 모든 것을 움켜쥐기보다 진정 소중한 것을 놓치지 않는 용기.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방향이 맞을까 자꾸만 흔들릴 때, 다시 이 말을 떠올려 본다.


뒤로 빚지지 않기 위해, 오늘을 돌보는 용기.


“오늘도 나를 돌보는 선택을 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다정한 응원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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