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랑의 조건이 흐려지는 순간

by 해루아 healua


연애를 하면서, 나만의 체크리스트가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이 세 가지를 지키지 못했다.


1. 매일 자기 계발을 한다 (독서, 운동 등)

2. 담배를 끊는다.

3.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우선이다.


연애 초반엔 뭐든 믿게 마련이다. 모든 게 좋아 보이고, 다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이 여전히 좋았지만, 내 인내심은 점점 닳아갔다.


그때 자주 했던 말이 있다.


“너도 똑같지. 결국 다 이렇게 되는 거겠지.”


남편을 만나기 전, 2년 반을 진지하게 연애했던 사람이 있었다.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 사람과 아버지와의 첫 식사 자리를 잡았다. 나는 약속 당일, 설렘 반 긴장 반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그는 아무 설명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유도 모른 채 이별을 통보받았다.


아버지를 보기 부끄러웠다. 나는 방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울었다. 눈이 퉁퉁 부어 거울을 봤는데, 그 안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못나 보이고, 한심해 보이는 한 여자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사랑받지 못하면, 나 자신도 나를 놓게 되는구나."


아버지도 그 모습을 보셨을까.

문을 열고 들어오시더니, 한 마디 던지셨다.


“넌 왜 맨날 결혼 실패를 하니.”


그 말은 마음 깊은 곳을 찔렀다.


‘실패라고? 나는 진심이었는데.’

‘누가 일부러 실패하고 싶어 하나…’


그 순간, 아버지가 밉고 야속했다.

그 후로 한동안, 우리는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다행히, 엄마가 곁에 있었다. 조용히 안아주며 말했다.


“다행이야, 이제라도 알게 된 거잖니.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어. 어디 멀리 여행이라도 다녀와~”


그 말이 참 고마웠다.

역시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더 잘안다고 했던가.




난 다음 날, 제주도로 훌쩍 떠났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프지만 괜찮아. 더 좋은 사람이 되어보자.

나를 더 사랑해 주자.’


그동안 미뤄왔던 것들을 하나씩 해냈다.

자격증 네 개를 취득했고, 그 도전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마침내, 원하던 회사로 이직에도 성공했다.


시간을 더 쪼개어 정말 바쁘게, 단단하게 살아냈다.


그 시간을 견디고 나니, 그날의 쓰라림조차 지금은 나쁘게만 기억되지 않는다.


그때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남편을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남편은 내 삶의 중심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사람이다.

함께 살며,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사람.


결혼 후, 나는 책을 꾸준히 읽는 사람이 되었다. 남편은 바쁜 와중에도 매년 100권 넘게 책을 읽는다.


덕분에 나도 작년엔 처음 48권을 읽었고, 올해는 남편처럼 100권이 목표이다. 지금은 독서모임을 이끄는 리더가 되었다.


남편의 삶에 대한 태도도 배울 점이 많다.

시 아버지의 담배 냄새가 너무 싫었다며 “나는 절대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라고 결심했고, 그 약속을 군대에서도, 회사에서도 끝까지 지켜왔다.


그리고 지금도, 나를 변함없이 아껴준다.


연애 시절부터 지금까지, 매일 점심 12시가 되면 전화가 걸려온다.


“밥은 먹었어? 심심하진 않아?

밥 잘 챙겨 먹고 있지?”


그리고 어느 날, 그가 이렇게 말했다.


“난 아이보다 네가 먼저야.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단 걸 보여주고 싶어.”


싸우기도 하고, 서운할 때도 물론 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남편의 말과 행동은 우리 사이의 다정함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이제는, 내 연애 초반의 내가 그려놓았던 '사랑의 조건들'은 흐릿해졌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 그의 조용하지만 다정한 하루하루가 그 모든 기록을 부드럽게 덮어주고 있으니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