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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mi Aug 01. 2018

통역사의 하루

Suck it up & keep going

영화 인터프리터 스틸컷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난다. 길쭉하고 날씬한 유리잔으로 레몬수를 한 잔 마신다. 가벼운 러닝화를 챙겨 신고 공원으로 향한다. 스트레칭으로 관절을 푼 뒤 CNN 뉴스를 들으면서 달린다.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고, 난민 구출 작전이 진행 중이고, 정상회담이 열린다. 귀로 들리는 내용을 입으로 따라 하면서 좋은 표현은 빠르게 익힌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한 뒤 에스프레소 한 잔을 추출한다. 커피를 음미하며 뉴욕타임스를 훑어본다. 달리면서 파악했던 내용을 상기하면서 주요 뉴스는 더 꼼꼼히 읽는다. 어림했던 시간이다. 나갈 채비를 한다. 소재는 고급스럽지만, 색상과 디자인은 얌전한 옷을 고른다. 불필요한 장신구는 하지 않는다. 화장은 단정하다. 자료를 챙기며, 상대측 대표단의 직함과 성명을 복기한다. 오늘 통역에 대비해 공부했던 내용을 차근차근 되새겨본다. 일명 속기사 노트라 하는 통역 노트, 1.0mm 제트스트림 펜이 가방에 제대로 들어있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집을 나선다. 출근이다.


통역사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일까? 언어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순발력, 기억력, 눈치, 배짱 전부 절실하지만, 시간과 건강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평행 우주에 사는 상상 속의 통역사 J모씨(30, 서울 거주)는 저런 모습이다. 현실은? 제 때 출근하기도 바쁘다.


비루한 현실은 순전히 나의 경우이고, 뛰어난 능력에 노력까지 게을리하지 않는 훌륭한 현업 통역사분들이 정말 많으시다. 가사에 육아도 모자라 후학 양성, 집필까지. 시간을 지배하는 슈퍼우먼들이 존재한다(통번역계의 남녀 성비는 매우 기울어져 있다). 그 와중에 뛰어난 영어 능력을 근간으로 미국 회계사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미국 로스쿨을 졸업한 뒤 대범하게 경력을 틀어버리는 분들도 적지 않다. 전달자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직접 실무에 뛰어드는 것이다.


대한민국 첫 여성 외교부 장관을 일례로 들 수 있겠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아내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는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의 말은 통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혀가 굳는 게 느껴지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가족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현장에서 사고를 친다! 결국 믿을 것은 몸의 기억뿐! 불수의근아 부탁해!


그래서 오늘도 하루의 시작은 뉴스다. 멍한 정신으로 팟캐스트를 재생하고 잠긴 목으로 기자의 억양을 모방한다. 듣고 보고 말하는 모든 것이 어느 때고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므로. 지식의 조각을 좇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가다 보면 영문은 모르겠지만 가끔은 제대로 된 길 위에 서 있다. 미로 같은 유럽의 골목길을 헤매다 처음에 목적했던 대성당에 홀연히 도착해 있을 때 느낄 법한 기분! 수집한 배경지식은 분야별 용어집으로 정리한다. 당장은 다 알 것 같아서 그냥 넘기기 쉬운 작업이지만 귀찮음을 무릅쓰고 정리해두면 나중에 큰 재산이 된다.


한 호흡 공백이 우울처럼 고여들 때 어딘가에서 분투하고 있을 멋진 언니들을 떠올린다. 모교 웹사이트에 업로드된 유튜브 영상을 통해 선배 통역사들의 하루를 훔쳐본다.


https://youtu.be/3mYoQGyJOoI

a day in the life of an interpreter


어찌할 수가 없이. 긴장감에 손가락 마디마디가 삐걱거리는 회의장에서 어떠한 구원도 기대할 수 없는 순간과 순간을 꿀꺽 삼키고 그래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를 애달픈 마음으로 응원한다.


Suck it up and keep going.

Maybe not today or tomorrow, but eventually,

we are all gonna be f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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