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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mi Jul 07. 2019

당신의 오해

성격이 팔자

김영하 작가의 산문 <여행의 이유>를 읽고 당신은 나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사람에게는 내재된 프로그램이 있어서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채 그 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한다는 내용을 읽었는데 그가 보기에 나의 경우는 어릴 때 주변에 어른들이 많았지만 정작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을 때 그 많은 어른 중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사람으로 자란 것 같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그것이 나의 프로그램인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 말이 폐부를 찔렀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을 잘 믿지 않는 사람인가? 즉, 의지의 문제가 신뢰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가 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나는 타인이 하는 말과 행동이 거짓일 수도 있다거나 이면에 다른 의도가 있으리라고 잘 의심하지 않는다. 상대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차후에 속은 걸 알고는 크게 분노하는 편인가 하면 그도 아니다. 단순히 믿거나 믿지 않는다는 차원을 떠나 사람에게 크게 기대를 걸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당신의 프로그램 이론을 빌려 오자면 당연히 받아야 할 보호를 받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에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는 기대 수준이 아주 낮기 때문인 듯하다. 즉, 직접적으로 피해를 야기하지 않는 한 속은 걸 알아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동기가 궁금하긴 하지만 그건 결말이 개운치 않은 드라마나 소설을 봤을 때의 느낌과 비슷한 정도다. 작품이 남긴 여운을 곱씹으며 나름의 결말을 그려 보듯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거니 짐작하고 만다.


그래서인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먼저 호의를 베푸는 사람에게 더 크게 감동한다. 예기치 않은 선물을 받은 기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호의는 오히려 호의이기 때문에 더욱 곤란하다. 그러나 너무 난처해서 얼마나 난처한 줄도 모르는 상황에서의 시의 적절한 도움은 비할 데 없이 감사하다. 길을 잃었을 때, 낯선 조직에 적응할 때, 감당하기 어려운 일에 부딪쳤을 때, 몸이 제어를 잃었을 때 청하지 않아도 돕는 손길이 없었다면 스스로는 도저히 헤어 나오지 못했을 일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당신의 이론은 반은 틀렸다. 의지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아주 믿을 만한 손이었다면 나는 언제고 덥석 잡았을 것이다. 다만 한 번 의지하기 시작하면 다시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나를 이토록 독립적인 사람으로 만든 것뿐이다. 당신 눈에 내가 뭐든 혼자서 본인 힘으로만 해결하려는 고집쟁이로 보였다면 그건 의지하는 법을 모르는 겁쟁이가 그저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해명

위의 글을 읽고 그 남자가 보낸 장문의 카톡


나의 오해는 결국 당신의 글을 낳았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누구에게도 쉽게 의지하려 하지 않는 당신을 만든 것 같다는 나의 말에 50점을 준 당신은, 내가 왜 나머지 50점을 실점했는지도 첨삭해주었다(고맙기도 해라). 당신이 타인에 쉽게 의지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타인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에 의지하는 것이 두려운 까닭이라고 했다.

너무나도 당신다운 글이어서, 글을 읽는 내내, 그리고 그 후에도 얼마간은 피식피식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어젯밤, 조심스레 그러나 약간은 주제넘게 당신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분석의 잣대를 들이밀었을 때, 나의 말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으나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는 그런 종류의 답답함을 아마 당신은 느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여느 때와 같이, 시의적절한 허술함보다 철 지난 정교함을 택했나 보다. 모든 걸 잊고 하루를 보낸 내게 날아든 당신의 해명을 보고, 참으로 당신다운 방식이라는 생각을 했다. 당신은 신중하지만, 결국엔 어떻게든 나의 오해를 바로잡는 사람이니까.

당신의 글을 읽는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문득 당신이 남긴 예전의 글들이 그리워졌다. 몇 개만 읽고 창을 닫으려던 나는 어느새 당신이 남긴 모든 글들을 다시 읽고야 말았다. 예전에는 당신의 글이 올라오길 기다리는 재미로 살았고, 글 가뭄 땐 쟁여둔 글들을 수 없이 반복하는 재미로 살던 나였는데. 자연스레 세세한 구절까지 기억하고 그걸 또 눈앞에서 암송하여 당신을 기함하게 하던 나의 모습이 무색하리만치, 오늘은 많은 글들이 낯설었다. 이 아이들은 내 안에 스스로 남으려 하지 않았고, 때문에 여러 가지 기억에 대신하여 남겨질 권리를 갖지 못했나 보다.

글들이 낯설었던 만큼, 이들을 쓴 당시의 당신도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글 속에 나타난 당시의 당신은 굉장히 위태로운 사람이었다. 몇 가지 분류로 당신이라는 사람을 설명하라는 ‘잘 알기 자료’에 불편함을 느끼는 채식주의자. 당장 무너지지 않는 것이 기특할 정도로 엉망인 신체를 이끌고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와중에 소소한 일화에서 정연한 행복을 찾는 사람. 타인의 예의 바른 관심에 지치고, 예의 없는 관심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글쓰기로 마음을 혼자 달래는 갑각류. 두 번 없을 사랑을 함께 했던 어떤 이를 이야기하다가도, 너무 지쳐버린 탓인지 연애에 관해서는 결국 자기 불신에 빠지고야 마는 연약한 상사화. 스스로 적어낸 작가 소개란의 표현처럼, 무엇보다도 당신은 프로페셔널한 예민러였다.

나는 이러한 당신이 좋았다. 아니, 정확히는 당신이 좋았기 때문에 이러한 모습을 안타까워도 했고, 헤아려보려고 했으며, 당신이 조금이나마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존재,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이토록 연약하고 예민하며 삶에 힘겨워하는 이가 내가 알던 당신이었다. 최근에 내가 보는 당신은, 잠도 제법 자고, 식사도 제법 할 뿐 아니라, 앞 뒤 없는 땡깡과 시비를 거는데 주저함이 없는 사람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전반적으로 단단해지고 생동감이 있어졌다는 말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문득, 당신이 그때의 위태로움에서는 조금 벗어난 것인가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약간의 근거 없는 뿌듯함과 함께 당신의 글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당신이 그토록 위태로워하는 모습을 보였던 글들은 8월에 집중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지난해 여름은 지독히도 사람을 지치게 했다. 올해 여름도 그에 못지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그리고 올해의 8월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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