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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mi Jul 11. 2019

통역사의 상도덕

직업윤리라 함은 특정 직군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 지켜야 할 행동규범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통역사에게도 직업윤리가 있다. 가장 기본적이고 중대한 원칙은 개입과 왜곡 없이 연사의 말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소위 상도덕이라고 하는 업계 내의 암묵적인 규칙이다. 통역 또는 번역을 업으로 삼고 있는 동료 통번역사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비상식적인 요율은 수락하지 않는다.


업계의 생태계를 교란하는 황소개구리가 되고 싶지 않다면 요율이 지나치게 낮은 일은 거절하는 것이 좋다. 낮은 요율로 서비스를 받고자 하는 수요에 공급이 부응하면 가격이 형성된다. 이런 식으로 한 번 후려치기에 성공한 고객은 다음에도 같은 시도를 반복할 것이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해지면 업계 전체에 디플레이션이 일어난다. 그러면 본인뿐만 아니라 동료 통역사 모두가 더 나은 통역을 위해 들였던 엄청난 시간과 노력에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게 된다. 고객이 단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고 느끼게 할 만한 통역을 하겠다는 각오로 실력을 쌓는 것이 옳은 방향이다.


통역 이외의 업무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사내 통역사로 들어가면 절대로 통번역 이외의 잡무는 수락하지 말라고 듣고 배웠다. 실제로, 엄격하게 근무시간을 엄수하고(절대로 야근을 하지 않고) 통번역 업무에만 충실했던(그 외의 업무는 단호하게 쳐냈던) 전임자의 후임으로 들어가서 덕을 보았던 적도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회의를 느낀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듯 정부 또는 공공기관 소속 통역사를 일컬어 영문에디터라고 부른다. 해당 기관에서 영문으로 나가는 모든 문서의 최종 감수를 맡기 때문인 듯하다. Editor의 역할을 더욱 명료하게 정의하기 위해 Editing과 Proofreading의 차이를 짚어볼까 한다. Proofreading 단계에서는 철자가 모두 맞는지, 문법적 오류가 없는지, 영어라는 언어의 일반 용례와 문화적 맥락에서 문장이 어색하지는 않은지 철저히 언어적 층위에서 텍스트를 살핀다. Editing 단계에 돌입하면 이를 넘어서 내용적인 측면에서 본문을 살피게 된다. 기관에서 발행하는 영문 문서의 최종 감수자가 본인이라고 생각하면 Editor의 책임은 더욱 막중해진다.


A국가와 B국가의 사이가 좋지 않은데 A국가에 보내는 문서에 B국가와의 협력 성공사례를 언급한 경우 외교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을지 지적하는 것은 Editing 단계에 해당한다. 문서의 수신자를 고려하여 같은 의미를 지닌 단어라고 할지라도 해당 인사가 선호하는 단어로 바꾼다던가 그의 정치문화적 배경을 고려하여 보다 중립적인 은유를 사용하는 것 역시 Editing 단계에 해당한다.


공식 서한의 경우 과거에 면담을 통해 만난 적이 있었다면 당시에 있었던 특징적인 에피소드를 언급한다던가 상대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그 사람의 신변 변화와 관련하여 축하나 경의를 표하는 말을 추가한다던가 최근에 해당 국가나 정부에 중대한 사건이 있었을 경우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넣는 것 역시 Editing 단계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소속된 부서의 현안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보다 넓은 맥락에서 관련 정보를 솎아낼 수 있다. 물론 얕더라도 되도록 넓은 분야를 접하는 건 늘 도움이 된다. 통역 현장에서, 특히 icebreaking 단계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는 신밖에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대한 정보 속에서 절실하게 필요하고 당장 유용한 정보를 얻으려면 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어떤 정보가 업무와 연관되어 있는지 알면 해당 정보를 보다 효율적으로 수집할 수 있다. 통번역 이외의 업무까지 맡을 때의 이점은 이러한 현안 파악이 용이해진다는 것이다. 팀의 일원으로서 기타 행정 업무까지 지원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본업에서의 재량이 늘어난다.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분야에서의 배경지식이 늘어나기 때문에 통역과 번역에 보탬이 되는 상승 작용이 일어난다.


따라서, 되도록 통번역 이외의 업무는 하지 말라는 조언이 납득은 가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이 부분만큼은 조직의 분위기와 각자의 상황에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 좋겠다. 주의할 점은 이 글 전체에서 사용한 업무라는 단어는 상황을 막론하고 절대 커피를 탄다거나 상사의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주는 등의 일을 지칭하거나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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