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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아련 Sep 07. 2023

벨기에 마트에서 입구 컷 당한 날

'델레즈'라 읽는 <Delhaize>


남편이 주재원으로 벨기에 브뤼셀로 발령 나면서 회사에서 집을 알아봐 주었다. 처음에 담당 직원이 추천해 주었던 지역은 브뤼셀 중심가 익셀(Ixelles) 쪽이었다. 아이가 없는 젊은 부부이다 보니 당연히 번화가를 선호할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부부는 번화가의 화려함에는 관심이 없어서 다른 지역으로 알아봐 달라고 부탁드렸다. 어떤 지역을 선호하냐고 묻기에 '그냥 조용한 거주 지역을 원해요. 그리고 걸어갈 수 있는 시장이나 마트가 많으면 좋겠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대여섯 개의 크고 작은 시장과 마트가 있는 동네에서 살고 있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매주 토요일에 열리는 로컬 마켓(Local Market)이다. 직접 농사를 짓거나 도매업을 하는 분들이 장을 여는데, 한국의 5일장 같은 개념이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열기 때문에 평소에는 보통의 마트를 이용한다. 공산품을 살 때는 가장 큰 대형 마트로 가고, 과일이나 채소 등 신선 식품을 사려면 중간 규모의 체인 마트가 가장 유용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실제로 제일 많이 가는 곳은 평일에도 열고, 신선한 채소나 과일, 생선이 있는 중간 규모의 체인 마트 <Delhaize>이다. 처음 벨기에에 왔을 때는 영어 발음으로 '델하이즈'라고 불렀는데, 프랑스어에 능통한 친구가 h는 묵음이라 '델레즈'로 발음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 내게 델레즈는 위치와 규모, 상품의 질까지 만족스러운 곳이지만, 우리가 이사한 당시에는 직원들의 파업으로 문을 닫은 상태였다. 한두 달이 지났을 무렵 델레즈가 다시 영업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이후 그곳을 자주 이용하게 되었다. 델레즈에서의 경험은 주로 긍정적이다. 프랑스어가 서툰 내게도 대부분의 직원이 친절하고, 아시아 요리에 많이 쓰이는 고추와 부추 등의 재료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6월이 끝나가던 어느 날, 평소처럼 편한 복장에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끌고 델레즈로 향했다. 평소와는 달리 열댓 명가량의 사복 입은 사람들이 출입구를 완전히 봉쇄하고 손님을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그 사람들 뒤로 보이는 마트 입구에는 겹겹의 카트가 쓰러져 있었다. 카트를 보관할 때처럼 겹친 후 그걸 그대로 옆으로 넘어뜨려 입구를 막은 것이다. 장바구니를 갖고 있는 나를 발견한 한 사람이 공격성을 표정에 띄우며 말했다. "Closed. (문 닫았어.)" 그다음 말은 없었지만, 표정에도 말이 있다면 '이만 꺼져.'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이때만 해도 벨기에 뉴스를 보지 않던 때여서 왜 입구 컷을 당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노사 간 합의책에 동의하지 않은 직원들이 있다는 것만 짐작할 뿐이었다. 마트 건물 옆,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니 손님은 한 명도 없고 상품을 채워 넣고 있는 직원들만 보였다. 분명 일하고 있는 직원이 있으니 휴일이 아닌 건 확실한데, 아무도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9월 초, 나는 또 한 번 입구 컷을 당했다. 매장 안에 불이 다 켜져 있었지만, 내가 그곳에 들어갈 수는 없다고 말했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을 수도 없었던 게 냉정한 표정의 그들은 영어에 서툴렀고, 나는 프랑스어에 서툴렀다. 그날 재료를 사지 않으면 저녁 찬을 만들 수가 없는 상황이라 10분 정도 더 걸어야 하는 다른 마트에 가기로 결정하고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 그때 내 왼쪽 시선에 있던, 끽해야 서른다섯쯤 되어 보이는 백인 남자 직원이 날 쳐다보며 웃긴 표정을 짓는 걸 보았다. 초등학교 저학년생이나 지을 법한 '용용 죽겠지' 표정으로 날 놀리고 있었다. 만약 그때 그가 손가락을 얼굴 쪽으로 올렸다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이 어디였든, 나는 참지 않고 바로 경찰을 불렀을 것이다. 싸우는 건 싫지만, 인종 차별을 참을 만큼 밸 없는 호구로는 절대 살 수 없으니까. '여기서 물건 못 사지롱~'이란 말을 프랑스어에 서툰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표정으로 번역해 주던 모자란 직원을 보며 생각했다.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생각이 바른 다른 마트 직원들의 인격이 싸잡아 모욕당할 수도 있으니,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가만히 짜져 있는 편이 좋을 거라고.


두 번의 입구 컷을 당하고 나니, 몇 달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은 파업의 내막이 궁금했다. 그래서 뉴스를 찾아봤다. 프랑스어나 네덜란드어를 잘했다면 더 깊은 내막을 알 수 있었겠지만, 일단 영어로 쓰인 뉴스들을 검색했다. 우선 <Delhaize>는 벨기에 브뤼셀에 본사를 둔 슈퍼마켓 체인으로 1800년대 중반에 설립된 전통이 깊은 회사였다. 또한 벨기에뿐만 아니라 미국 일부, 그리스, 로마니아, 인도네시아, 룩셈부르크 등에도 매장을 운영하는 다국적 기업이라고 한다. 올 3월, 본사는 벨기에 안의 128개의 매장을 '프랜차이즈화(化)'한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바로 그것이 파업의 계기가 되었다. 본사가 말하는 '프랜차이즈화'의 의미를 한국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풀이하자면, 본사에서 직영으로 운영하던 매장을 가맹점으로 만들어 개인이나 다른 기업들에게 팔아서 하청 업체만을 관리하겠다는 뜻이다. 파업의 원인을 알게 되었을 때,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한국에서 성장기를 보내며 너무나 익숙하게 접했던 뉴스가 벨기에에서도 똑같이 녹화 재방송되는 것만 같았다.


벽돌로 쌓아 올려진 마트 옆쪽 벽면에 "Vendu!"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글씨인데, 오늘 마트 옆을 지나가다 우연히 보게 되었다. '벙뒤'라고 읽는 이 단어의 뜻은 '팔렸다'는 형용사이기도 하고, '배신자'또는 '파렴치한'이라는 명사이기도 하다.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의미는 통한다고 생각하며 씁쓸한 마음이 일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최후의 승자가 누가 될지 잘 알고 있다. 분명 시위대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현실의 이익을 따져 재빨리 이직하거나 타협하는 대신 여전히 마트 앞을 서성이고 있다. '배신'이라는 감정은 상대를 믿고 의지했어야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어쩌면 마트 앞의 시위대가 급여도 지급되지 않는 파업을 지속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물론 근무 조건 개악을 막는 것도 중요한 목표이긴 하겠으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벨기에 토종 기업에 '직접 고용'되어 일하고 있었다는 자부심을 뭉개 버린 회사에 대한 복수심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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